[include(틀:다른 뜻1, other1=라틴 제국 황제, rd1=로베르 1세(라틴 제국))] [include(틀:역대 서프랑크인의 왕)]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bert_I_de_France.jpg]] || || '''이름''' ||<(> 로베르 1세(Robert I)|| || '''생몰년도''' ||<(> 866년 8월 15일 – 923년 6월 15일 || || '''재위기간''' ||<(> 922년 ~ 923년 || || '''아버지''' ||<(> '강철공' 로베르 4세 || || '''어머니''' ||<(>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장녀인 투르의 아델라이드 || [목차] == 개요 == 로베르 1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제8대 왕이었다.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 백작 "강철공''(le fort, 르 포르) 로베르 4세와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황녀 아델라이드의 아들로 파리의 백작이자 서프랑크의 제6대 국왕이 된 [[외드]]의 아우였다. 885년 형 외드와 함께 바이킹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파리를 지킨 것을 인정받아 후에 귀족들에 의해 서프랑크의 제8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898년 형 외드의 승하 이후 왕위를 주장하지 않고, 카롤루스 왕실의 [[샤를 3세]] 단순왕의 가신이 되었으나, 그가 바이킹을 여러 번 격퇴하게 되면서 명성을 덜치게 되었다. 922년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샤를 3세 단순왕의 군대와 싸우던 중, 단순왕의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후계자인 [[라울(서프랑크)|라울]]은 로베르 1세의 사위였다. 로베르 1세의 두 번째 왕비인 베르망두아의 베아트리스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이었기에 그들 사이의 아들인 '대 위그'부터는 카롤루스 대제의 모계 후손이었다. 즉, 로베르 1세의 남계 후손은 모두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었다. == 생애 == 로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느스트리)와 앙주의 백작인 로베르 4세 '강철공'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경건왕' 루트비히 1세, 즉 [[루도비쿠스 1세]]의 장녀인 투르의 아델라이드였다. 또한 로베르 1세는 첫 부인 엘리스의 사후, 890년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1세의 딸 베아트릭스(Béatrice,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는데, 장인인 헤르베르트 1세 역시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으로, 대제의 차남인 롬바르디아 왕 [[피핀 카를로만]]의 손자 피핀의 아들이었다. 한편 첫 부인 엘리스에게서 얻은 딸 아델라이드를 다시 후처인 베아트릭스의 남동생 뫼욱스와 수아송의 백작 헤르베르트 2세에게 시집보냈다. 로베르 1세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바로 '위그 르 그랑', 즉 대 위그로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아버지였다. 로베르는 885년 형 외드와 함께 바이킹의 침입에 대항하여 파리를 지켰고, 885년 서프랑크 카롤루스 왕조의 제5대 왕인 '비만왕' [[카를 3세]]에 의해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다. 형 외드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파리 백작 작위를 동생인 로베르가 잇게 되었는데, 파리 백작 작위는 훗날 카페 왕조와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때까지 별다른 작위가 없는 후손들에게 세습되었다. 형 외드가 서프랑크 왕국의 제6대 국왕으로 추대되자 로베르는 파리의 백작 등 많은 지역의 영주가 되었다. 898년 외드가 죽었을 때 로베르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지 않고, 카롤루스 왕조의 [[샤를 3세]] '단순왕'을 제7대 왕으로 인정하며 그의 가신이 되었다. 로베르는 바이킹의 침입에 계속 맞서 프랑크 왕국의 북부에서 싸웠으며, 911년 '''샤르트르 전투'''에서 바이킹 수장 [[롤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샤를 3세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샤를 3세는 바이킹을 왕국의 북부 즉 노르망디에 거주하도록 하는 대신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것이 훗날 잉글랜드와 프랑스, 이탈리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노르망디 공국]]의 시작이었고, 여기에 정착한 [[노르드인|노르드]]계 [[바이킹]]들은 프랑스화한 [[노르만족]]이 되었다. 바이킹의 격퇴로 로베르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고,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샤를 3세가 동부 로트링겐(로렌, 로타링기아))을 복속시키고, 그 지역의 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자 로베르를 중심으로 한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922년 6월 29일 랭스에서 로베르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이미 6월 22일에 탈출한 상태였던 샤를 3세 단순왕은 당연히 반발했고, 곧 내전이 벌어졌다. 1년 후 수아송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수아송 전투(923년)]]}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가 샤를 3세의 군대와 싸워 이겼으나 로베르 1세는 전사했다. 일설에는 샤를 3세 단순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 후에 그의 손자인 위그 카페가 오랜 기간 [[프랑스 왕국]]을 통치하게 될 카페 왕조를 개창했다. [[분류:서프랑크인의 왕]][[분류:866년 출생]][[분류:923년 사망]][[분류:파리 백작]][[분류:로베르 왕조]][[분류:전쟁 사망자]][[분류:페이드라루아르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