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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br](Lorenzo di Giovanni di bicci de' Medici|| || '''출생''' ||[[1395년]][br][[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사망''' ||[[1440년]] [[9월 23일]] (45세)[br][[피렌체 공화국]] 카레기|| || '''배우자''' ||지네르바 카발칸티 ,,(1416년 결혼),,|| || '''자녀''' ||프란체스코, 피에르프란체스코|| ||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 || '''형제'''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코시모]]|| [목차] [clearfix] == 개요 == 피렌체 공화국의 은행가로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동생. == 상세 == 1416년에는 [[지네브라 카발칸티]]와 결혼했으며, 알비찌 가문인 [[리날도 델리 알비치]]의 음모로 형 코시모가 1433년 9월 7일에 감옥에 수감되자 친척들과 함께 무젤로에 몰려들어 코시모를 석방시키기 위한 군대를 모집했다. 28일에 형 코시모와 사촌 아베라르도와 함께 재판을 받아 로렌초는 5년간 베네치아로 추방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형 코시모와 베네치아에서 합류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합류했다가 1년도 안되어 형과 함께 피렌체로 복귀했으며, 1438년에는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의 공의회가 벌어질 장소였던 페라라에서 문제[* [[가톨릭]] [[주교]]가 자신의 교회에서 [[그리스 정교]] 방식으로 예배가 진행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가 이러한 문제에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정적들이 볼로냐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또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자금 부족에 시달려 막대한 부채의 담보로 아시시의 중세 성을 내놓아야만 했고, 수많은 그리스 손님들에 대한 비용도 지불할 수 없었다.]가 생기자 페라라로 건너가 피렌체의 안전과 무료 숙박 시설에 대해 얘기하면서 대표단이 회의 중에 공의회에서 1달에 1,500플로린을 융자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했다. 결국 페라라에서 [[역병]]이 돌기까지 하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피렌체에 와서 공의회를 열도록 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1435년에는 교황에 대한 은행 업무를 하기 위해 [[로마]]로 옮겼다. 그의 직계후손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마지막 남편이었고,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 '검은 깃발의 조반니'는 먼 친척 되는 교황 [[레오 10세]]의 신임을 얻어 경호대장이 되었으며, '검은 깃발의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직계후손이 끊기자 스페인 왕으로부터 피렌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초대 대공으로 책봉받아 18세기까지 피렌체를 지배하였다. [각주] [[분류:메디치 가문]] [[분류:1395년 출생]] [[분류:1440년 사망]][[분류:피렌체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