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6년 출생]][[분류:1923년 데뷔]][[분류:1939년 은퇴]][[분류:1992년 사망]][[분류:오버레이설주 출신 인물]][[분류:네덜란드의 축구선수]][[분류:고 어헤드 이글스/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축구]][[분류:네덜란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eo Halle.jpg|width=100%]]}}} || ||<-2> {{{#000000,#e5e5e5 ''' 이름 ''' }}} || {{{+1 '''레오 할러'''}}}[br]'''Leo Halle''' || ||<-2> {{{#000000,#e5e5e5 ''' 본명 ''' }}} ||레오나르트 헤르만 게리트 할러[br]Leonard Herman Gerrit Halle || ||<-2> {{{#000000,#e5e5e5 ''' 출생 ''' }}} ||[[1906년]] [[1월 26일]] / [br] {{{-1 [[네덜란드]] 데번터르}}} || ||<-2> {{{#000000,#e5e5e5 ''' 사망 ''' }}} ||[[1992년]] [[6월 15일]] (향년 86세) || ||<-2> {{{#000000,#e5e5e5 ''' 국적 ''' }}}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28]] || ||<-2> {{{#000000,#e5e5e5 ''' 신체 ''' }}} ||[[키(신체)|키]] 184cm | [[체중]] 90kg || ||<-2> {{{#000000,#e5e5e5 ''' 직업 ''' }}}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 ||<-2> {{{#000000,#e5e5e5 ''' 등번호 '''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고 어헤드 이글스]] (1923-1939)''' || ||<-2> {{{#000000,#e5e5e5 ''' 국가대표 ''' }}} ||15경기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 / 1928~1937)^^ || [목차] [clearfix] == 개요 == 네덜란드의 전 축구선수.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http://resources.huygens.knaw.nl/bwn1880-2000/lemmata/bwn6/halle|Resources]]] == === 선수 생활 === ==== 클럽 ==== 지금의 고 어헤트 이글스는 [[에레디비시]]와 [[에이르스터 디비시]]를 왔다갔다하는 그저 그런 클럽이지만 할러와 얀 더크레이크(Jan de Kreek), 레오의 형 얀이 뛰던 1930년대에는 네덜란드 축구 챔피언십 우승도 노릴 만한 전력의 팀이었다. 할러는 14살부터 고 어헤트 이글스 소속이었고 17살이던 1923년부터 1군팀에 소속되었다. 할러는 고 어헤트 이글스의 2차례 챔피언십 우승 당시 주역이었으며 16년간 고 어헤트 이글스에 소속되어 있었다.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 할러는 [[베프 바크하위스|바크하위스]], [[요프 판넬런|판넬런]]과 함께 1928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산 시로]]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훌리오 리보나티]], [[아돌포 발론체리]]에게 골을 허용하며 2대3으로 이탈리아에 패배했다. 산 시로의 사자라는 별명도 얻고 귀국길에서 큰 환영을 받을 정도로 데뷔전에서 뛰어난 플레이를 펼쳤지만 당시 대표팀에는 만만찮은 경쟁자 [[헤유스 판데르묄런|판데르묄런]]이 있었다. 판데르묄런이 대표팀 주전으로 뛰는 동안 할러는 계속 후보에 머물렀으며 이 구도는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월드컵]]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에서 할러가 주전으로 장갑을 낄 것으로 예상했지만 월드컵에서도 [[밥 글렌드닝|글렌드닝]] 감독의 선택은 판데르묄런이었고 네덜란드는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에 2대3으로 패했다. 월드컵을 끝으로 판데르묄런이 대표팀에서 밀려난 후 할러는 기회를 잡았고 그의 다음 국가대표팀 경기는 11월의 스위스 원정 경기였다. 이 리벤지 매치에서 할러는 네덜란드의 골문을 지키며 4대2로 네덜란드의 승리를 이끌어 복수에 성공했다. A매치에서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일랜드 자유 주]]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를 상대로 2경기 연속으로 [[페널티 킥]]을 막아내기도 했던 할러는 [[폐렴]] 투병으로 대표팀에서 한달반 정도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폐렴으로 인한 후유증은 커리어 내내 할러를 괴롭혔으며 재발을 막기 위해 할러는 유니폼 안에 [[수영복]]을 입기도 했다. 할러는 총 15경기에 출전했으며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37년 10월의 프랑스전이었다. 이 경기에서도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2대3으로 패했다. === 은퇴 이후 === 은퇴 이후 할러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에서 코치로 있었으며 협동조합에서 30여년을 일했다. 또한 운전 기사로도 자동차 수리점과 영화 제작사에서도 일했다. 1986년부터 고 어헤트 이글스의 특별석 이름이 레오 할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말년의 할러는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다 1992년에 사망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De leeuw van Deventer(데번터르의 [[사자]])[* 그의 이름 레오나르트도 사자에서 유래한 이름인 것을 감안하면 적절한 별명이다.]라고 불리던 골키퍼. 30년대 고 어헤트 이글스의 넘버원 골키퍼였으며 당당한 체구와 두꺼운 가슴둘레, 큰 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다소 둔해 보이는 체구였지만 몸놀림이 경쾌했고 안정감도 좋았다. == 뒷이야기 == * 1933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했을 무렵부터 할러는 이들의 출현을 탐탁지 않아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대표팀]]이 할러와 같은 [[호텔]]에 머물렀을 때 그들이 [[Deutschlandlied|독일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자 그들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 사생활 == 할러는 1933년에 결혼했고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하지만 그 중 딸 하나는 [[참척|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전쟁]] 시절에 여느 네덜란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할러의 가족들도 식량이 부족해서 고생했고 고기 공장에서 운전 기사로 일하면서 공장에서 나온 뼈로 [[수프]]를 끓여 먹으며 연명했다. 그리고 이 뼈 수프를 다른 이웃들에게도 나눠줬다고 한다. 할러는 친절하고 유머 감각도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2차 대전때의 수프처럼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돈을 많이 모으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다는 생전의 인터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내는 그 생각을 탐탁지 않아했다고. == 수상 == === 클럽[* 할러는 고 어헤트 이글스의 [[원 클럽 플레이어]]인 관계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 * [[에레디비시|네덜란드 축구 챔피언십]] 우승 2회: 1929-30, 1932–33 * 네덜란드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2회: 1928-29, 1934-35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