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 [[파일:external/ichef.bbci.co.uk/col_mol_57_54_large.jpg|width=100%]] || [[파일:external/shortwalkslondon.files.wordpress.com/gf-pic.jpg|width=100%]] || [목차]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lq-eqfpRt4)]}}}|| || {{{#e1e1e1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 || {{{+1 Great Fire of London}}} [[1666년]] [[9월 2일]] 새벽 2시경 [[잉글랜드 왕국]] [[런던#시티 오브 런던|런던]][* 광역화된 지금의 [[런던|그레이터 런던]]이 아닌, 시티 오브 런던과 그 인근지역.]에서 발생한 [[대화재]]. 빵 공장에서 일어난 불로 시작되었으며 당시 소방담당자의 무책임으로 인해 조기에 진화되지 않아, 큰 피해가 발생했다. == 상세 == 푸딩 레인(Pudding lane)의 빵집에서 시작된 불은 9월 2일부터 5일까지 런던 4/5를 전소시켰다. 이 화재는 자그마치 4일 동안 꺼지지 않았고 87채의 교회, 1만 3천 채의 집이 불타 7만 명이 집을 잃었다. 당시 인구 8만 명 중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공식 기록에는 단 '''6명'''만이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불이 너무 뜨거워서 시체가 전부 녹아내려 구분할 수 없었다는 설'''과 '''극빈층이 시민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화재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불타 버렸다. 당시 국왕인 [[찰스 2세]]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지급을 약속하였다. 한편 이 화재로 [[쥐]]들도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그전 해인 1664년 말부터 1666년까지 발생한 [[흑사병]](The Great Plague)이 종료되는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 또한 나타났다. == 화재 이후 == 이 사건 이후로 런던 중심지는 완전히 새로운 계획 도시로 세워졌고 석재 건축법이 생기고 [[유럽]] 최초로 화재를 담당하는 소방 조직과 [[소방차]](마차), 화재 [[보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 런던의 소방 시스템은 국가 소방 체계가 아니라 민간인들이 얼마씩 각출한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영 소방 체계였는데 그 빵집이 출자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소방업자들이 출동하지 않아 화재가 크게 번졌다. 화재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울화의 대상은 [[외국인]]과 [[가톨릭]] 교도에게로 돌아갔고 분노한 대중은 이게 다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가톨릭 교도[* 그런데 정작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다...] 때문이라면서 거리에서 무차별 폭행했다. 당시 국왕인 찰스 2세는 시민의 분노가 왕실로 향할까 봐 사실상 폭동을 방치했고 화재 범인으로 프랑스인 시계공 로베르 위베르가 잡혀 고문 끝에 자기가 범인이라고 실토했으나, 사실 그는 화재 발생 이틀 뒤에 런던에 도착했고 이 사실은 그가 사형당하고 나서야 알려졌다. 이 사건이 있고 200년 뒤에도 사건 애도 추모비에 '이게 다 가톨릭 교황 때문이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하고 300년이 지난 1986년에야 실제로 화재 원인을 제공했던 빵집 주인의 후손이 사과하며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몇 세기가 지난 후, 일본의 [[관동대지진]]에서도 이 누명이 재현되고 만다. 발화지점인 런던 푸딩레인에는 현재 대화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런던 지하철]] Monument역에서 내리면 된다. 지하철역 이름인 Monument가 바로 런던 대화재 기념비를 뜻하는 말이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런던, version=774)] [[분류:영국의 화재]][[분류: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