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전간기)] [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연표)] Rheinlandbesetzung Remilitarization of the Rhineland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60308002091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6-03-08&officeId=00020&pageNo=1&printNo=5487&publishType=00010|독, 라인랜드 재점거 - 1936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목차] == 개요 == [[1936년]] [[3월 7일]] [[나치 독일]]의 [[퓌러]] [[아돌프 히틀러]]가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전격적으로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켜 무장을 다시 선포한 사건. 라인란트 재무장은 [[나치 독일]]이 벌인 최초의 무력도발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나치 독일의 군비 증강 계획이 처음으로 실제 결과로 나타난 사례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적 입지를 한 층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 배경 ==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벨기에]]와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는 자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독일]]의 [[라인 강]]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라인강 동쪽 60km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으며 이를 [[베르사유 조약]]에 명문화시켰다. 뒤이어 1925년 [[로카르노 조약]]으로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는 다시 한 번 명문화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hineland.jpg]]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라인란트.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 하의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는 '''라인란트 지방뿐만 아니라 [[라인강]] 동쪽 60km까지'''로 독일 최대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포함하여 [[알자스]] 지방과 접경인 바덴 지방까지 독일과 접한 모든 [[벨기에]]-[[룩셈부르크]]-[[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국경지역이었다. 독일인들에게 라인란트는 [[단치히 자유시|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과 함께 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트라우마였다. 그나마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은 독일 [[영토]]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간 곳이지만,라인란트는 명백히 독일 영토였고 독일의 주권이 행사되는 지역임에도 군대의 주둔 및 무장은 불허된 비무장 지대였다. 이는 1차 대전 때 공격받은 벨기에와 프랑스에겐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으나[*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지 못하게 하면 상륙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침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배후중상설]]이 지배하던 독일에서는 치욕스런 일이었다.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했지만 [[비무장지대]]는 그대로 뒀는데 여기의 재무장은 로카르노 조약까지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벨기에와 프랑스가 이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연합국]]의 공동 대응 전선인 [[스트레사 체제]]가 무너지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자 히틀러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라인란트에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키더라도 연합국은 1935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끝내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 [[나치 독일|독일]]의 행동 == [[1936년]] [[2월]] 히틀러는 외무부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군부에 라인란트 재무장의 뜻을 밝혔다. 군부는 국방장관이며 군부의 1인자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결사반대하였는데 '''우리도 라인란트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프랑스가 쳐들어오는데 절대 못 막는다'''가 핵심적인 반대 논조였다. 군부에게도 라인란트 재무장은 숙원 중의 숙원이었으나 최소한 이들은 현실적인 감각은 충분했다. 외무부에서도 군부만큼은 아니지만 반대 기류가 강했는데 베르사유 조약 파기로 분위기가 형성되어 몇 년 지나면 외교적으로 기회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서두르다간 역풍만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에도 히틀러는 프랑스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밀어붙였다. 결국 군부는 타협하여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내고 만약 프랑스가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철수하고 화해 신호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1935년 [[대영제국|영국]] 및 프랑스 외교관들과의 접견에서 '''“아, 님들 내가 실수했음. 베르사유 조약 파기하면서 라인란트도 같이 원래대로 돌렸어야 했는데 까비”''' 하면서 떠 보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 침략을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예상대로 라인란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영국에서는 [[1936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후인 [[10월]] 즈음에 독일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 그들은 독일이 외교를 통해 라인란트를 재무장할 것이라고 여겼지 군사적인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군대를 라인란트로 진입시켰다. 히틀러와 군부의 타협대로 투입한 병력은 [[독일 국방군|독일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이었다. 그 중 3,000여 명만이 [[라인 강]]을 건너고 나머지 27,000여 명은 라인 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머물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대응할 경우 즉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즉 프랑스가 군대를 움직였다면 이후 히틀러가 더욱 강경하게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찬스였다.] 히틀러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인란트 진입을 강행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왕국]]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1935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의 공조체제에 따르고 있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에 대한 영-프-이 3국의 공동대응체제인 [[스트레사 체제]]가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무너졌다. 이에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패전국인 독일의 재군비마저 허용되는데 ''''승전국인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 정도는 용납하겠지?''''란 생각으로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를 침략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라인란트 문제에 영프와 공동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티오피아 침략]]이 성공리에 끝나 가자 전쟁 이후 이탈리아가 다시 대독 공동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침략이 채 마무리되기 직전인 [[1936년]] [[3월]] 초에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진주를 시작했다. == 각국의 대응 == 독일에 대한 대비 때문에 거금을 들여 국경지대에 [[마지노선]]까지 구축한 프랑스가 독일군이 국경 너머에 나타나는 일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에서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총참모장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수뇌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공황]] 이후 국방예산 삭감으로 프랑스군은 크게 약화된 반면 독일군은 질적으로 숫적으로 크게 증강되어 우리보다 우세에 있다'''는 독일군을 과대평가하는 결론을 내렸다. 1937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때도 개판이었으니 1935년의 독일 국방군은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디딘 아기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프랑스군 수뇌부는 기존 군사동맹국과의 공동 대응을 고려했지만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략 전쟁의 마무리에 골몰하고 있었고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는 1921년의 프랑스-폴란드 군사동맹을 준수하겠지만 프랑스 본토가 침략당했을 경우를 약정했기 때문에 독일 대사에게는 프-폴 군사동맹 조약이 발효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대사에게는 프랑스와 함께하겠다고 말하는 외교적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는 로카르노 조약에서 배제된 바가 있다. 따라서 로카르노 조약 위반인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반대할 명분도, [[1934년]]의 독폴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뚜렷한 이유도 없었던 것.][* 어처구니 없는 것은 훗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독일이 내 땅에만 안 오면 됨 하고 독일 영내로 진주하다가 바로 국경 지대로 돌아가며 폴란드를 사실상 버렸다.] 프랑스의 다른 동유럽 동맹국인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도 비슷한 논조였고 오직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만 프랑스가 라인란트 진입 시 같이 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뿐이다. 그래도 프랑스 정부는 어떻게든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려고 했으나 군 첩보부가 라인란트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을 '''30만 이상'''으로 오판하는 바람에 의지를 상실했다. 군사행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프랑스는 아직 청년 인구의 3분의 1이 갈려나간 1차대전 [[참호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곧 있을 프랑스 총선거에서 집권 내각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대응을 포기'''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 발악으로 [[국제연맹]]에 독일에 대한 [[경제제재]]를 제소했으나 이에 찬성한 나라는 오직 [[1935년]] 체결된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지키려고 했던 [[소련]]뿐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에게 독일에게 경제 제재를 가한다는 건 아직 [[대공황]]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자국 경제에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주저했다. 다만 소련 역시 한 달 뒤인 [[1936년]] [[4월]]에 독일 - 소련간의 무역협정이 체결된 점에서 보듯 어디까지나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인 제스처에 불과했고 실제로 독일을 적대시할 생각은 없었다. [[영국]]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육군도 부족하고 전쟁 준비도 안 되어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독일을 달래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하는 방향이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프랑스가 독일에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을 반대했고 프랑스 대사를 소환해 군사적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은 의회에서 영국 여론이 전쟁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전쟁장관 더프 쿠퍼는 독일 대사를 소환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면 영국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독일 땅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영국은 독일의 라인라트 재무장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영국 역시 프랑스처럼 전쟁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독일에 유화적인 태도는 [[오스트리아 병합]]과 [[뮌헨 협정]]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탈리아 왕국]]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1935년]] [[국제연맹]]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경제제재(형식적인 수준이었다)를 가하기로 결의한 것에 대한 앙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무솔리니]]가 직접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한다는 연설까지 했다. [[벨기에]]는 1차 대전 이후 오랜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어 대독전선에서 공동대응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프랑스를 더는 믿을 수 없겠다 싶어 군사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 정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독일은 1923년 프랑스와 함께 [[루르 점령|루르 공업지대를 불법 점령]]한 벨기에에 어떻게든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1940년 5월 10일 중립선언은 상큼히 씹으며 벨기에를 때렸다. [[폴란드]]는 [[1921년]]에 체결된 프랑스-폴란드 방위 협정을 준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라인란트는 독일 땅이었으니 방위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천명했고 [[국제연맹]]에서 독일에 대한 경제제재 투표에서 기권했다. 훗날 두들겨맞는 폴란드지만 1935년에는 기나긴 무역분쟁을 종결하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히틀러를 폴란드는 위험요소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의 선택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대침공을 불러일으키는 악수가 되었다. [[미국]]은 [[먼로 독트린]] 정책으로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관심도 없었고 설사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대공황]]의 여파에 한창 시달리고 있던 때라 전혀 행동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해관계에 있던 모든 나라들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했으며 히틀러의 도박은 성공했다. == 결과 == 전 독일이 열광했고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조차 '''[[퓌러]]'''를 연발하면서 히틀러를 [[찬양]]했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히틀러 최대의 업적으로 소개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지난 패전의 울분을 상당부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망명 중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내 지하 조직마저 '''[[아돌프 히틀러|독재자]]에 대한 [[독일인|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는 진짜'''라며 한탄했다. 이러한 열광적 지지와 히틀러의 주장대로 프랑스가 대응을 포기했다는 점 때문에 히틀러 독재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군사적, 외교적 이유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반대했던 관료 및 군부는 '''총통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라인란트 지역에 독일 군대가 진주한 사건이며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 및 군비 증강 계획 일체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증강 과정에서 나치 독일이 행동으로 보여준 최종 결과에 가깝다. 하지만 재무장이라는 단어가 임팩트가 크다 보니 라인란트 재무장은 나치 독일의 재무장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았다. == 기타 == 과거 한국에는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엄밀히 말하면 [[바이마르 공화국|독일]]은 라인란트를 타국에게 잃은게 아니라 [[군대]]가 주둔할 수 없게 된 것이므로 재'''점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러모로 사건 이전 및 이후의 전개가 [[마오쩌둥]]의 [[6.25 전쟁]] 참전 결정과 닮았다. 마오쩌둥과 히틀러 둘 다 주위 사람들이 극구 말린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의외로 큰 성공[* 중국이 6.25 전쟁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결국 '[[순망치한]]'의 고사에 따라 [[북한]]을 지켜내는 데 성공하여 [[완충국]]으로 만들었고 세계 최강 [[미군]]과 호각으로 겨루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2세계]]에서의 발언권을 키웠다.]을 거두어 그 둘의 권위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Hearts of Iron IV]]에서 독일 중점으로 등장한다. 1936년에 시작하기도 하고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후 히틀러의 정치적 행보나 유럽 내부의 정세와 긴밀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 루트와 대체역사 루트의 결정적인 분기로 구현되었다. 라인란트 진행 이전에는 사단이 진입할 수 없고 대공포도 지을 수 없지만 라인란트 중점 완료 시 혹은 전쟁을 시작한 이후에는[* 내전 포함] 이후에는 가능해진다. 라인란트 재무장 이벤트에서 프랑스가 반대하면 프랑스와 독일 간 전쟁과 코뮌 내전이 동시에 터진다. '재무장'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임팩트가 워낙 크기 때문에 현대 독일도 군비를 증강한다거나 관련된 뉴스가 보이면 항상 '재무장' 드립이 따라붙는다. 한 예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독일이 실제로 군축을 멈추고 '재무장'을 하겠다고 선언해 관련 드립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독일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독일이 지나친 군축으로 약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독일의 결정을 환영했다. [[분류:나치 독일/사건사고]][[분류:전간기]][[분류:1936년/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