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스페인의 화가]][[분류:1599년 출생]][[분류:1660년 사망]][[분류:화폐의 인물]][[분류:세비야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쿠바의 총독, rd1=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 ||<-2> '''{{{+1 디에고 벨라스케스}}}'''[br]Diego Velazquez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디에고 벨라스케스.png|width=100%]]}}} || || '''본명'''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 ||<|2> '''출생''' ||[[1599년]] [[6월 6일]] || ||[[스페인]] [[세비야]] || ||<|2> '''사망''' ||[[1660년]] [[8월 6일]] (향년 61세) || ||[[스페인]] [[마드리드]] || || '''국적''' ||[[스페인]] || || '''직업''' ||궁정화가 || || '''스승''' ||프란시스코 파체코 || [목차] [clearfix] == 개요 == [[스페인]]의 [[화가]]. [[압스부르고 왕조]] 말기인 [[펠리페 4세]] 시절, 궁정 화가가 된 이후 평생 궁정화가로 지냈다. '''[[바로크]] 시기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후대의 화가들인 마네, 클림트, 고야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전부 그의 이름을 찬양했으며, 자기애가 엄청났던 피카소 역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른바 '''화가들의 화가'''였다.] '''사실적인 초상화'''로 유명하며, 특히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는 '''역대 최고의 초상화'''로 자주 거론되는 작품이다. 또한 대표작인 '''<시녀들>'''은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후대의 화가들에게까지 큰 영감을 주었다. == 생애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12세때는 화가 프란시스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는 [[1617년]]에 [[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의 [[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스승으로부터 문화적인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스승의 학술적인 [[동료]]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모임에 소개되었다. [[1618년]]에는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와 파체코의 끈끈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로는 솜씨있게 그린 종교화와 [[풍속화]]가 있다. 스페인은 풍속화의 [[역사]]가 짧았으나,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와 같은 작품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새롭고 정직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1622년]], 젊은 화가가 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새로운 국왕인 [[펠리페 4세]]의 [[후원]]을 얻고자 [[마드리드]]로 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감을 안은 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1년 후에 왕의 [[초상화]]를 그려 궁정화가라는 공직에 임명되었다. 그 후 곧바로 마드리드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평생 궁정화가로 지냈다.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초상화를 벨라스케스 외에는 아무도 그리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 작품 목록 == || [[파일:디에고 벨라스케스 Las Meninas-시녀들.jpg|width=100%]] || || <시녀들>(Las Meninas) || [[캔버스]]에 그린 [[유화(미술)|유화]]로 크기는 316 x 276cm이며, [[프라도 미술관]]에 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펠리페 4세]]와 그의 두번째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의 소생으로,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였다. 훗날 외삼촌이었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었다.]를 그렸다. 이 <시녀들>이라는 작품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어본 작품이기도 하다'''. [[165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처음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시녀들>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파일:인노첸시오10세의 초상.jpg|width=100%]] || ||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Portrait of pope Innocent X) || 1650년에 제작. 벨라스케스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역대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초상화를 그릴 때 대상을 미화시키거나 정형화시키지 않고, '''사실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캔버스로 옮겼는데, 이 작품에서도 특유의 화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소장. || [[파일:벨라스케스의 비너스.png|width=100%]] || || <비너스의 단장>(The Toilet of Venus) || [[1647년]]에서 [[1651년]]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캔버스에 유화로 크기는 177 x 122.5cm이다. 영국 [[런던]]의 [[영국 국립미술관|영국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이 1906년에 구입하여 소장한다. 2023년 11월 7일 2명의 [[Just Stop Oil]] 시위자가 [[반달리즘|안전망치로 보호유리를 깨트린]]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660/0000048669?sid=104|일]]이 일어났다. || [[파일:La infanta María Teresa de España.jpg|width=100%]] || ||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La infanta María Teresa de España) || [[1653년]]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캔버스에 유화이다. 펠리페 4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스페인)|마리아 테레사]]의 14살때의 시기를 그린 것이다. 상술한 <시녀들>의 주인공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이복언니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마리아 테레사의 새어머니인 마리아나의 초상화로 추정되었지만 후에 마리아 테레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레스가 당시 기준으로 구식이어서 그런 듯하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안나의 초상화를 보면 드레스며,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다. 적어도 한 세대 전 유행이었다는 소리이다.] 초상화 속 저 패션은 이미 당대 유럽에서 구닥다리 패션으로 악명높았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사가 처음 시집갔을 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궁정에서 꽤나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그 밖에 작품으로는 <후안 데 파레하>, <무염시태>, <계란을 부치는 노파>, <펠리페 4세의 입상>,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천상모후의 관을 쓰는 성모>, <세비야의 물장수> 등이 있다. == 기타 == * [[파블로 피카소]]가 16살 때 [[프라도 미술관]]에서 <시녀들>을 보고 깊이 매료되어 <시녀들>을 모사해 무려 '''58점'''의 [[패러디]]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베르사유(드라마), version=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