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문서는 통일 이전의 동서독 국경을 다룹니다. 통일 이후의 동서독 국경, rd1=그뤼네스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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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독일어]]: Innerdeutsche Grenze / deutsch-deutsche Grenze
* [[영어]]: Inner German border
[[1945년]] [[나치 독일|나치당이 통치하던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전 후 [[연합군 점령하 독일|연합군의 동서 분할 점령]]으로 독일이 분단되면서 생긴 경계선이었다. 1990년에 [[동서독 통일|독일이 재통일]]되면서 현재는 유적지가 된 곳이다. 지금도 주(州) 경계선으로 기능하고 있다. [[철의 장막]]을 이루던 것 중 하나.
[[베를린 장벽]]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있는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 독일어로는 "Innerdeutsche Grenze"라고 하며, 직역하면 '독일 안의 경계선'이다. Grenze는 [[국경]] 외에 단순히 경계라는 뜻도 있다. 사실 동독을 별개의 나라로 생각하지 않았던 [[서독]] 입장에서는 경계라고 번역하는 쪽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 역사 ==
1952년 이전에는 통과가 비교적 쉬웠으나, 그 이후에는 통과가 어렵게 넓은 도랑을 설치했다. 1967년 이후부터는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동독]] 측의 빌무트하우젠(Billmuthausen) 마을은 1978년에, 에를레바흐(Erlebach) 마을은 1986년에 "경계선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동서독 통일]] 3개월 전 1990년 7월 1일에 철폐되었다. 철폐 후의 변화는 [[그뤼네스반트]] 참고.
== 구성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System_of_gdr_border_fortification.jpg|width=100%]] ||
|| 동서독 국경선 중 동독의 군사시설 그림 ||
||1. 국경선([[동서독 통일]] 전에는 동서독의 실질적인 [[군사분계선]])
2. [[국경]] [[말뚝]][* 한국의 [[군사분계선]]에도 이런 말뚝이 일정 간격으로 박혀 있다.]
3. [[동독]] [[영토]]비석
4. 동독측 [[비무장지대]]
5. 차량 방호용 도랑
6. [[동독]]측 [[비무장지대]] [[철조망]][* 한국으로 치면 [[남방한계선]]과 유사하다.]
7. [[동독]]측 비무장지대와 이어져 있는 통문
8. [[지뢰]] 매설 구역
9. [[차량]] 방호용 [[콘크리트]] 도랑
10. [[탈출]] 방지용 [[가로등]]이 비추는 구역
11. 동독 [[국가인민군 국경군|국경군]] 도보 순찰로
12. 탈출 방지용 [[가로등]]
13~16. 동독 국경군 [[GOP]]
17. [[군견]]
18. 탈출 방지용 감지 [[사이렌]]
19. [[동독]]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과 지나치게 가깝다고 판단된 촌락에 [[철조망]] 대신 축조한 [[콘크리트]] 장벽
20. [[동독]]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철조망]]
21. [[동독]]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통문
22. [[동독]]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검문소||
== 접경지역: 치헤리-뵈크비츠 마을의 경우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b/b5/Zicherie_Stein.JPG/640px-Zicherie_Stein.JPG|치헤리에 세워진 표석: "독일은 나뉘어질 수 없다. 치헤리, 1958년 6월 17일"]][* DEUTSCHLAND IST UNTEILBAR. ZICHERIE 17.6.58.]
[[니더작센]](서독)의 치헤리(Zicherie) 마을과 [[작센안할트]](동독)의 뵈크비츠(Böckwitz) 마을은 각기 다른 주에 속해 있었지만, 한 생활권인 사실상 하나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동서독이 분단되면서 이 두 마을도 강제로 갈라졌다. 1987년판 에서 이 마을을 소개한 바를 보면, 1945년 7월 1일 [[소련군]]이 뵈크비츠로 들어와 치헤리 마을과의 사이에 경계선을 세웠다. 그날 이후로 두 마을 사이에는 사실상 자유 통행이 어려워졌고 당분간 학생들의 통학만 허용되었으나, 그마저도 끝내는 중단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외진 길로 돌아가거나 소련군에게 술을 뇌물로 주면 통과할 수 있었지만 동독 경비대가 배치되면서는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고, 1952년 5월에는 두 마을 사이에 높이 3m의 나무 담이 쳐졌다. 그리고 뵈크비츠 마을의 거주민 중 스무 가족은 후방 [[작센]]으로 쫓겨났는데, 추방된 가족 중 한 가족만 빼고는 이후 동독을 탈출하여 치헤리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장벽은 더욱더 단단해졌다.
이 장벽으로 당연히 이산가족도 생겼지만, [[독일 재통일]]로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되면서 두 마을은 다시 합쳐졌다.[[https://www.ytn.co.kr/_ln/0104_201411082159246866|#]]
== 관점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9px-Hier_ist_deutschland.jpg]] ||
|| [[서독]]의 시점: "여기는 [[국경|독일의 끝]]이 아닙니다. [[동독|저쪽 땅]]도 조국입니다!".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nzer_nato_attack.jpg]] ||
|| [[동독]]의 시점: [[NATO]] 공격으로부터의 방어선. ||
지도를 보면 [[땅거스러미|동독 국경이 서독 쪽으로 튀어나온 곳]]이 있다. 여기는 풀다 갭(Fulda gap)이라고 해서 소련군 기갑부대가 [[프랑크푸르트]]로 최단거리로 밀고 내려와 서독을 관통, 전선을 양분하고 프랑스까지 진격할 것이 우려되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서독 수도 역할을 맡지 못한 한 이유이기도 하며, 미 육군 [[제5군단(미국)|제5군단]]이 상시 주둔하여 소련군을 감시하는 요주의 지역이었다.
== 갤러리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oint_alpha_nebel.jpg|width=100%]]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nnerdeutsche_Grenze_beim_Grenzmuseum_Schifflersgrund.jpg|width=100%]] ||
|| 동서독 경계선에 설치된 군사시설 사진.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Herleshausen_border_crossing.jpg|width=100%]] ||
|| A4 [[아우토반]] 위에 설치되어 있던 [[동독|동]][[서독]] 경계검문소. [[헤센]] 주 키르히하임에서 [[작센]] 주 [[괴를리츠]]까지 이어지는 노선으로 동독 정부가 지정한 서베를린 행 '통행로' 중 하나였다. A4 아우토반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가는 방법은 A4 아우토반을 타고 동쪽으로 직진하다 게라 인근에서 A9 아우토반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서베를린까지 가는 방식이었다. 해당 검문소는 서독 헤센 주와 동독 에어푸르트 구 경계 상에 존재하던 헤를레스하우젠(서)/바르타(동) 검문소이다. 사진은 서독 측 검문소인 헤를레스하우젠 검문소. ||
|| [[파일:Inner-German_border_near_Lubeck.jpg|width=100%]] ||
|| Auch drüben ist Deutschland(저쪽도 독일입니다)!
1987년 9월 [[뤼베크]] 부근의 서독측 경계선. ||
== 관련 문서 ==
* [[서독-동독 관계]]
* [[베를린 장벽]]
* [[군사분계선]]
* [[휴전선(베트남)]]
[[분류:1990년 해체]][[분류:냉전]][[분류:독일민주공화국]][[분류:독일의 역사]][[분류:서독-동독 관계]][[분류:정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