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분류:성북구의 건축물]][[분류:이승만]][[분류:근대건축물]] [include(틀:이승만)]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 90호 ||<|2> ← || '''91호''' ||<|2> → || 92호 || ||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 '''서울 돈암장''' ||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 || ----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39100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f39100 제91호}}}''' || || {{{+1 {{{#fff '''서울 돈암장'''}}}}}} {{{-1 {{{#fff 서울 敦岩莊 | Donamjang House, Seoul}}}}}} {{{-1 {{{#fff }}}}}}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로]]3길 84 (동소문동4가) || || '''{{{#fff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인물기념시설 || || '''{{{#fff 면적}}}''' || 1동(한옥 본채) 건축면적 155.17㎡ || || '''{{{#fff 지정연도}}}''' || [[2004년]] [[9월 4일]]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 돈암장, 너비=36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울_돈암장_좌전경_(촬영년도___2015년).jpg|width=100%]]}}} || || {{{#fff ''' 돈암장[*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303224&ccbaKdcd=79&ccbaAsno=009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울_돈암장_대문_측면_(촬영년도___2015년).jpg|width=100%]]}}} || || {{{#fff ''' 돈암장 대문[*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303218&ccbaKdcd=79&ccbaAsno=009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에 지은 근대 [[한옥]].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약 2년 간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다. == 역사 == 원래 이 곳은 [[조선시대]]에 [[빈민]]들을 치료하던 [[활인서|동활인서]]가 있었던 자리였으며, [[일제강점기]] 초중반에는 [[젖소]]를 키우는 평산[[목장]]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 곳에 저택을 지은 시기는 1939년으로, 조선시대의 [[내시]]였던 송성진이 자신이 거주할 목적으로 건립했다. [[건축]] 공사는 훗날 [[무형문화재]] 74호로 지정받은 [[목수]] 배희한이 맡았다. || [[파일:Syngman_Rhee_and_Francesca,_LIFE_Magazine.jpg|width=100%]] || || 1947년 5월, [[라이프(잡지)|LIFE 잡지]]에 실린 돈암장 근처에서 찍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 부부. || 나중에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의 소유가 되었다.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자그마치 33년이나 망명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조선에 머물 곳이 없었고, 그래서 잠시 [[웨스틴조선호텔|조선호텔]]에 머물렀다가 곧 장진영[* 일부 자료에는 '장진섭'으로 적혀있다.]의 집을 빌려 거처했다. 이때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장덕수]]가 같은 동향 사람이자 같은 당 당원인 장진영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돈암장(敦岩莊)'이란 이름은 이 때 지은 것으로, 당시 행정구역 상으로는 [[돈암동]]에 있다하여 붙인 명칭이다.[* 돈암장이 있는 지역은 1963년에 동소문동으로 분동되었다.] 다만, 오롯이 이승만이 전용한 것은 아니었다. 건물 3채 중 이승만에게 빌려준 건물은 54평 짜리 [[양옥]] 안채와 [[한옥]] 별채였고 장진영은 남은 1채 만을 사용했다. 그 중 이승만 본인은 양옥에 머물렀고 한옥 별채는 [[비서|비서진]]들이 사용했다. [[이승만]]이 머물던 당시, 돈암장은 중요한 정치적 무대가 되었다. 이승만이 [[우익]] 진영의 최고지도자로 해방 공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정치가였던 만큼, 그가 거처한 돈암장 역시 핫플레이스가 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하루에도 적게는 300여 명, 많게는 600여 명 까지도 방문했으며, 이 중에는 우익 인사들은 물론, 일부 [[좌익]] 인사들도 있었다. 특히 1945년 말에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우익 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이승만이 그 중심에 서면서 돈암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2830|#]]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승만]]과 [[미군정]]은 충돌하기 시작했고, 점점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집주인 장진영은 이승만에게 슬슬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심지어는 물건 둘 곳이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이승만의 거처 공간에 자신의 짐을 갖다 놓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눈치 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압박을 준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1947년 8월 25일에 돈암장 생활을 정리하고 원효로4가에 있는 마포장(麻浦莊)으로 [[이사]]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7082600239102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08-26&officeId=00023&pageNo=2&printNo=7442&publishType=00010|#]][* 처음에는 [[운현궁#s-2.2.1|운현궁 양관]]을 사용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듯 하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7080300329203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08-03&officeId=00032&pageNo=3&printNo=257&publishType=00020|#]]] 새 거처 마포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가 썼던 여름 [[별장]]으로, 하지 [[중장]]이 주선해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포장은 햇빛도 잘 안들었으며 비만 오면 습해져서 살기 불편했고 결국 얼마 못가 [[종로구]] [[이화동(종로구)|이화동]]에 있는 [[이화장]]으로 한 번 더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원 주인 장진영이 돈암장을 다시 오롯이 소유했으나 장진영은 [[6.25 전쟁]] 때 [[납북]]당해 죽었다. 이후 돈암장의 필지는 분할되었고 건물들은 분리 매각되어 현재는 소유주들이 각각 다르다. 이 중 [[한옥]] 본채 만이 2004년 9월 4일에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91호로 지정받았다. [[이승만]]이 기거했던 양옥은 헐렸고 현재 그 자리에는 교회가 있다. == 구조 == '''※ 현재 남아있는 한옥 본채를 대상으로 설명한다.''' * 전반적으로 건물 구조가 [[궁궐]]의 침전 양식과 비슷하다.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 옆에 [[온돌|온돌방]]이 있으며 온돌방의 3면을 퇴간이 두르는 형태로, 이는 [[조선의 궁궐|조선 왕궁]]의 침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전봉희 교수는 이를 두고 "[[경술국치|조선 멸망]] 이후 궁실 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했다. 애당초 돈암장을 지은 사람이 [[내시]]였고, 건축을 맡았던 배희한은 [[창덕궁 대조전]] 복구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 최원식의 제자였다. * 장대석 3단 위에 단층으로 지은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며 목재는 백향목으로 사용했다. 건물의 [[가구]]는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조립해서 지었다. 각 기둥마다 주련이 붙어있으며 정면 기준 왼쪽에서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일곱 번째 칸에 [[현판]]이 달려있다. [[주춧돌]] 사이의 고막이벽은 [[타일]]로 마감했다. * 본채 앞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다. == 대중매체에서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야인시대 돈암장.png|width=100%]]}}} || || {{{#fff ''' 〈야인시대〉의 돈암장[* 사진 출처 - [[SBS]].] '''}}} || [[8.15 광복|광복]] 이후 정치사를 다룬 드라마에 여러 번 외관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등장했다. --[[김두한(야인시대)|김두한]]이 여기서 [[이승만(야인시대)|이승만]]에게 조선 보리밥에 된장국, 김치를 얻어먹고 [[심영(야인시대)|심영]]이를 잡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