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Deutsches Tanz- und Unterhaltungsorchester [[영어]]: German Dance and Entertainment Orchestra [목차] == 개요 == [[나치 독일]] 시기에 있던 [[재즈]] [[빅 밴드]] 비슷한 단체. == 창단 동기 == 원래 나치는 재즈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방관적이기는 커녕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애당초 [[나치즘]]이라는 사상이 [[인종차별]]을 밑밥으로 깐 것이었기 때문에 재즈와 [[블루스]]는 '열등한 [[흑인]]으로부터 유래된 음악' 이었고, '속된 장단과 가락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저질의 소음' 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나치는 집권 초기에 재즈를 [[유대인]], [[사회주의]] 성향의 작곡가들이 쓴 작품과 함께 아예 [[개발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실권을 잡은 지 2년 뒤인 1935년 10월에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의 부하였던 나치 선전성 방송 담당관 오이겐 하다모프스키[* NSKK (국가사회주의 자동차 군단) [[중장|집단지도자]], 나중에 괴벨스와의 갈등으로 나치당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후 [[무장친위대]] [[중위]]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소련군에 의해 전사했다.]는 독일의 모든 방송국에서 재즈 방송을 금지시켰고, 재즈의 퇴폐성을 부각시키는 선전 방송을 계속 내보냈다. 비록 이 조치는 [[1936 베를린 올림픽|올림픽]] 때문에 한시적으로 완화되기도 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그런 거 없었다. 1938년에 [[뒤셀도르프]]에서 개최한 '퇴폐음악(Entartete Musik)' 이라는 전시회에서도 재즈를 엄청나게 깠는데, 아예 포스터부터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흑인이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다비드의 별]]을 가슴에 달고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디자인되었다. [[파일:Entartete_musik_poster.jpg]] 이런 식으로. 하지만 비슷한 취지로 먼저 개최한 [[퇴폐미술]] 전시회와 달리, 퇴폐음악 전시회는 나치의 [[높으신 분들]]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애당초 흑인=유대인이라는 공식 자체가 억지 중의 억지였을 뿐 아니라, 퇴폐음악의 아이콘으로 내세운 [[색소폰]](Sax+o+phone)이라는 악기는 본래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작스(Adolf Sax)가 개발한 '아리아적 악기' 였기 때문에 색소폰 제조 업자들이 '퇴폐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를 만든다고 뜬금없이 까이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선전성의 음악 전문가들은 재즈 방송을 금지했음에도 여전히 독일인들의 재즈 선호도가 높았기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1939년에 [[독일 국방군|독일군]]이 [[폴란드]]를 [[폴란드 침공|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자, 독일 선전성은 재즈 통제 문제로 더 골치아픈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선전성은 적국의 라디오 방송 청취를 금하고 발각될 시 [[사형]]까지 가능한 엄한 처벌을 가했지만,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이 몰래 적국 방송을 청취했고 그 과정에서 방송을 타고 나오던 재즈의 인기도 계속 유지되었다. == 창단과 활동 == 결국 나치의 선전 전문가들도 재즈를 완전히 금지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 대신 미국식 빅 밴드에 현악 앙상블을 더해 재즈의 리듬을 죽이고 스윙감도 약화시킨 형태의 밴드를 계속 정책적으로 밀어주는 방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다. 1941년 10월에 괴벨스는 영화음악과 가요 작곡가였던 프란츠 그로테에게 이러한 형태의 38인조 대규모 밴드를 조직해줄 것을 의뢰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악단이 이 독일 춤과 오락 악단이었다. 괴벨스는 이 악단을 여타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들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같은 [[클래식(음악)|클래식]] [[관현악단]]과 같은 위상으로 올려놓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단원들도 주로 독일 국적의 순혈 아리아인 음악가로 엄선했다. 다른 독일 재즈 밴드들이 외국인 음악가들-물론 이들도 순혈 아리아인이라는 전제 하에-을 적극 영입했던 것과는 반대의 행보였고, 실제로 창단 당시의 악단 단원 중 외국인은 불과 네덜란드인 한 명-트럼페터 헨리크 '헹크' 브뤼인스-뿐이었다. 새로 조직된 이 악단은 제국방송(Reichs-Rundfunk-Gesellschaft)의 휘하 단체로 편입되었고, 그로테와 게오르크 헨셸이 공동 지휘자를, 호르스트 쿠드리츠키가 부지휘자를 맡았다. 1942년 7월 부터는 [[베를린]]의 마주렌알레에 있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매주 새로운 곡들을 준비해 방송용 녹음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다만 상업용 [[음반]] 제작은 전쟁 중에 물자 절약을 이유로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제국 방송국들의 방송 전용으로만 소량 제작되었다. 녹음 제작 외에는 가끔 공개 무대에서 공연도 했지만, 매우 드물었고 주 활동은 방송녹음이었다. 이 악단의 레퍼토리는 주로 독일 작곡가들, 그 중에서도 순혈 아리아인의 가요나 [[오페레타]], 레뷰 같은 무대 작품, 영화음악의 히트 넘버에서 고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다른 밴드도 가능한한 '재즈색을 죽인다는 조건으로' 외국인 작곡가-심지어 적국인 영국이나 미국 작곡가까지도-의 곡을 골라 연주할 수 있었지만, 이 악단은 아예 '새로운 독일의 무도음악'을 취지로 삼은 만큼 외국곡을 가능한한 배제한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물론 당시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라든가 중립국이기는 했지만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 작곡가의 작품 연주는 허락되었다. 또 점령국 작곡가들의 작품도 어용이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반나치적이 아니면 용인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레퍼토리의 절대 다수는 독일 작곡가들의 곡들이었다. 독일 본토가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시달리게 되자 악단은 1943년 봄에 폭격의 위협에서 비교적 안전한 [[프라하]]로 거점을 옮겼고, 프라하의 제국 방송 스튜디오에서 계속 방송 출연과 녹음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 밴드도 다른 잔존 재즈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틈만 나면 선전성에서 '너무 뜨거운 거 아니냐', '리듬이 너무 거칠다'는 식으로 계속 간섭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창단 멤버인 그로테와 헨셸은 1944년 2월에 영화음악 쪽의 일이 과중하다는 '공식적인' 이유로 좌천되었다. 이들의 후임으로는 도이칠란트젠더 방송국의 전속 경음악단을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빌리 슈테히와 [[헝가리]]인 바이올리니스트 겸 경음악단 지휘자 버르너바스 폰 게치가 영입되었고, 이들은 패망 직전까지 직책을 유지하면서 악단을 이끌었다. 1944년 9월에는 여타 제국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악단 멤버 전체가 소위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의 목록(Gottbegnadeten-Liste)'이라고 불리는 병역 면제 예술인 목록에 포함되어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덕분에 이 악단은 괴벨스의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 뒤에도 징집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5년 5월 5일에 [[체코]]의 [[빨치산]]들이 제국 방송의 프라하 스튜디오를 습격해 점령하면서 이 악단의 역사도 끝났다. 이 과정에서 악장(콘서트마스터)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쿠르트 헨네베르크와 편곡자 에리히 카슈베츠 같은 일부 단원들은 격렬한 시가전에 휘말려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포로로 붙잡혀 수감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였고, 심지어 나치 당원이었던 슈테히는 풀려난 뒤 연합국의 제재 능력이 미치지 못하던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활동하면서 활동 금지 조치가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복귀해 계속 재즈 음악가로 활동했다. 다른 생존 단원들도 비나치화 심사를 거쳐 활동 재개를 허락받은 뒤 계속 독일 재즈계에서 연주 활동을 벌였다. == 전후의 평가 == 물론 독일 재즈 음악계에서 이 밴드는 '실재했지만 언급하기는 껄끄러운' 존재로 남아 있다. 비록 이들이 [[찰리와 그의 악단]]처럼 노골적인 정치 선전에 활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괴벨스의 지시로 조직된 관제 악단이라는 한계를 가진 것은 마찬가지였고 그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용된 재즈 밴드의 안좋은 사례라는 [[반면교사]] 격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그 이전과 이후의 빅 밴드와 비교해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실제로도 이들의 음악은 스윙감도 별로 없는 데다가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같은 부드러운 음색의 현악기로 떡칠을 해서 이게 재즈인지 무드 음악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애매모호한 성격 때문에 전후에도 계속 평가절하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돈을 끌어모으기 쉬웠던 백인 밴드 리더들인 아티 쇼, 글렌 밀러, 진 크루파, 해리 제임스 같은 이들이 자신의 빅 밴드에 현악 합주를 더해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이 악단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재즈사에서 그다지 큰 비중이 없고, 하물며 이 아이디어를 나치에서 강제해 실행한 이 악단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힘들다.] 결국 아무리 좋게 봐줘도 [[짝퉁]] 재즈(Pseudo-jazz). 그래서 당시 [[청소년]]들을 비롯한 젊은 세대들도 전반적으로 이들의 음악을 경멸했으며, 특히 [[스윙 청소년]]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인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 밴드의 멤버 상당수가 전후에도 계속 음악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편제나 음악 스타일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패전 후 독일 각지의 방송국에서 창단된 탄츠오케스터(Tanzorchester, 영어로 하자면 댄스 오케스트라)들은 대부분 빅 밴드+현악 합주라는 편제로 구성되었고, 이들 악단의 리더도 빌리 슈테히, 호르스트 쿠드리츠키, 아달베르트 루츠코프스키 같이 대부분 이 악단에서 활동한 이들이 맡았다. 과거를 반성하기 보다는 잊어버리자는 전후 복구 시기의 풍토 속에서 이들의 음악은 예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소비되다가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본토인 미국과 마찬가지로 [[록 음악]]을 비롯한 팝 음악의 대공세를 받으며 서서히 잊혀졌고, 현재는 주로 구세대들의 [[추억팔이]]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이 남긴 방송용 녹음들은 일부 유실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보존되어 종전 후 [[소련군]] 관할 지역에 속해 있던 베를린 제국 방송국을 접수해 만든 구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방송국 자료실에 소장되었다. 하지만 나치 관제 밴드였기 때문에 이 녹음들의 음반화는 동독에서 아예 금지되었고, 1970년대에 동서독 방송 자료 교환이 성사되었을 때 녹음의 일부가 서독 한정으로 폴리도르에서 두 장의 [[LP]]로 발매되었다. [[동서독 통일|독일통일]] 뒤 이 악단의 녹음 자료들은 여타 동독 소재 자료들과 함께 [[포츠담]]의 독일 방송 자료실로 이관되었고, 1990년대에 이들의 방송 녹음 대부분에 해당되는 82곡의 녹음들이 모노폴(Monopol)이라는 음반사에서 여섯 장의 [[CD]]와 LP로 출반되었다. 모노폴 음반 발매 이후에는 코흐(Koch)에서 13곡, 유베(Jube)에서 아홉 곡의 미공개 녹음을 담은 CD를 각각 내놓았고, 이들 음반은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 [[분류:독일의 밴드]][[분류:유럽의 재즈 아티스트]][[분류: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