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남량 군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30006 0%, #E34234 20%, #E34234 80%, #A30006)" '''{{{#000 남량 제2대 군주[br]{{{+1 康王 | 강왕}}}}}}'''}}} || || '''[[묘호|{{{#000 묘호}}}]]''' ||<(>없음 || || '''[[시호|{{{#000 시호}}}]]''' ||<(> 강왕(康王) || || '''[[연호|{{{#000 연호}}}]]''' ||<(> 건화(建和, 399년 ~ 402년) || || '''[[성씨|{{{#000 성}}}]]''' ||<(> 독발(禿髮) || || '''[[휘|{{{#000 휘}}}]]''' ||<(> 이녹고(利鹿孤) || || '''{{{#000 생몰}}}''' ||<(> ? ~ 402년 || || '''{{{#000 재위}}}''' ||<(> 399년 ~ 402년 || || '''{{{#000 부친}}}''' ||<(>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 [[남량]]의 제2대 군주. 선비 [[독발부]] 제6대 수령이었던 [[독발사복건]]의 차남으로 남량 제1대 열조 무왕 [[독발오고]]의 동생이자 제3대 경왕 [[독발녹단]]의 형이었다. == 생애 == 397년 9월, [[후량(오호십육국시대)|후량]]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궤를 구원하기 위해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양궤와 더불어 후량의 태원공 [[여찬]]의 군대를 요격하려 했지만 패배했다. 399년, 형 독발오고가 낙도(樂都)로 천도하자 서평공(西平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되어 안이(安夷)[* 現 [[칭하이성]] 핑안(平安).]에 주둔했다. 동년(399) [[후량]]의 태자 [[여소(후량)|여소]]와 [[여찬]]이 [[북량]]을 공격하자 북량왕 [[단업]]의 요청으로 양궤(楊軌)와 함께 출병했다. 북량의 방어가 예상 외로 단단하고 남량의 구원군도 코앞에 당도하니, 여소와 여찬은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이후 독발리록고는 양주목(涼州牧)으로 임명되어 서평(西平)[* 現 칭하이성 시닝.]에 주둔했다. 그 해(399) 6월, 형 독발오고가 음주 낙마 사고로 승하하여 유조에 따라 동생인 독발리록고가 제2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한 후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낙도에서 서평으로 천도했다. 12월, 후량의 태조 의무제 [[여광(후량)|여광]]이 붕어하자 장수 금수(金樹)와 소교(蘇翹)에게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창송군(昌松郡)의 막구(漠口)에 주둔하도록 했다. 400년, 연호를 건화(建和)로 개원했다. 3월에 후량 제2대 은왕 [[여소(후량)|여소]]를 죽이고 후량의 제3대 군주로 등극한 영황제 [[여찬]]이 중서령 양영(楊潁)의 간언을 무시한 채 남량을 쳤다. 독발리록고는 동생인 [[독발녹단]]을 삼퇴(三堆)로 보내 후량군을 막도록 했다. 여찬의 후량군은 독발녹단의 군사보다도 많은 데다가 하나같이 정예로 소문이 나 독발녹단의 3군은 싸우기도 전에 모두 겁에 질려 떨었다. 하지만 대장인 독발녹단이 의자에 앉아 동요하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자 군중은 금세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윽고 독발녹단은 도착한 여찬의 군대와 싸워 후량군을 격파하고 2,000여 명을 참수했다. 익월에 양궤와 서평내사 전현명이 독발리록고를 살해할 계획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둘 다 처형되었다. 동년(400) 6월, 영제 여찬이 북량의 도성인 장액(張掖)을 포위하고 건강(建康) 일대를 노략질했다. 거기장군 독발녹단이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후량의 도성 고장(姑臧)을 기습하니, 여찬의 동생인 농서공 여위(呂緯)는 고장성 북쪽 성문에서 성벽에 의지해 방어만 했다. 남쪽 성문을 점거한 독발녹단은 성벽 위에서 병사들과 술잔치를 펼치고 고장성을 누비며 8,000여 호를 포로로 잡은 뒤, 동쪽 성문으로 빠져나왔다. 영제 여찬은 수도가 탈탈 털렸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회군했다. 독발리록고는 독발녹단의 공을 인정하여 광무공(廣武公)에 봉했다. 동년(400) 7월, [[서진(오호십육국시대)|서진]]의 왕 걸복건귀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에게 패망해 수백 명의 기병만을 거느린 채 남량에 항복해왔다. 독발리록고는 그를 진흥(晉興)에 머물게 하고 상빈의 예로서 대접했다. 걸복건귀는 자신의 아들들인 걸복겸(乞伏謙) 등을 서평에 인질로 보냈다. 진북장군 독발구연(禿髮俱延)이 독발리록고에게 말했다. >"서진은 본래 우리의 속국임에도 왕을 칭했으며, 지금 귀순해온 것도 스스로 막다른 길에 몰려서일 뿐, 결코 진심이 아닙니다. 만약 그가 배반해 후진에 항복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서쪽에서 우리를 침공해올텐데, 이는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 좋은 점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거처를 을불부(乙弗部) 한가운데로 옮겨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이에 독발리록고가 답했다. >"짐은 신의(信義)를 널리 떨쳐 천하의 인심을 얻고자 한다. 내게 스스로 귀순해온 걸복건귀를 도리어 의심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어찌 신용받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얼마 안지나 걸복건귀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으로 도망치면서 과연 독발구연의 말대로 되었다. 독발리록고는 후회하며 독발구연을 불러 걸복건귀를 뒤쫓게 했지만, 구연이 황급히 황하(黃河)에 도착했을 땐 이미 걸복건귀는 후진의 영역에 들어선 뒤였다. 인질로 붙잡혀 있었던 [[걸복치반]]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 독발리록고는 대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광무공 독발녹단이 간곡히 말려 그만 두고 도성에 그를 감금시켰다. 401년, 도성에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대신들이 제위에 오르라 권하니 칭제를 고민했다. 그러나 장수 유물륜(鍮勿崙)이 시기상조라 간하여 그만 두고 하서왕(河西王)으로 고쳐 칭했다. 그리고 동생인 독발녹단에게 도독중외제군사, 양주목, 녹상서사를 겸하게 했다. 한편, 북량의 [[저거몽손]]이 정권을 찬탈해 저거남성의 동생 저거부점(沮渠富占)과 저거구석자(沮渠俱石子)가 500여 호를 이끌고 남량으로 망명해왔다. 같은 해(401) 2월, 독발녹단을 보내 후량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대파하고 우복사 양환(楊桓)을 사로잡았다. 독발리록고는 군신들을 불러서 간언을 멈추지 말 것을 명령하고, 강직한 전현충(田玄沖)과 조탄(趙誕)을 박사제주로 임명해 독발씨 왕족과 공경의 자제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동년(401) 7월, [[서량]]의 [[이고(서량)|이고]]와 북량의 저거몽손이 함께 후진에 복속하고 조공을 바쳤다. 10월에 저거몽손이 그의 아들 저거해념(沮渠奚念)을 인질로 보내왔는데 독발리록고는 이를 거절하고 저거몽손의 동생인 저거나(沮渠拏)를 인질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저거몽손이 서신을 보내 저거나는 보낼 수 없다고 이르자 독발리록고는 분노해 장송후 독발구연, 흥성후 독발문지(禿髮文支)에게 기병 10,000명을 주어 북량을 치도록 했다. 이들의 군대가 북량의 만세(萬歲)와 임송(臨松)을 약탈하고, 저거몽손의 사촌동생인 저거선선구자(沮渠鄯善苟子)와 백성 6,000여 호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저거몽손이 종숙인 저거공차(沮渠孔遮)를 보내 저거나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하니, 독발리록고는 약탈한 것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 해(401) 12월, 후량의 안정공 여초(呂超)가 반역자인 초랑(焦朗)을 토벌하려고 하자, 초랑은 조카 초명(焦崇)을 남량에 인질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독발리록고는 독발녹단을 보내 초랑을 돕도록 했다. 독발녹단은 후량군을 격파하고 중루장군 왕집(王集)과 병사 300여 명을 참수했다. 402년 2월, 후량의 도성 고장이 북량에게 공격받자 제4대 말제 [[여륭]]이 남량에 도움을 요청했다. 독발리록고는 군신들을 모아 이 일을 의논했다. 상서좌승 파연륜(婆衍侖)이 말했다. >"지금 고장(姑臧)은 흉년이 한창이라 민생이 피폐해져 곡식 한 섬에 돈 10,000전이나 하고, 야외에는 풀이 한 포기도 없어 식량을 수급할 길이 없습니다. 저거몽손은 군대를 이끌고 1,000리 밖에서 달려왔는데, 그 역시 군량 수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두 도적들이 서로 죽이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저거몽손이 무리해서 고장을 취한다면 그때 우리가 고장을 쳐 차지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군을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독발녹단이 반박했다. >"파연륜은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합니다. 고장이 비록 지금 허약하다고 하나, 그 지리적 위치가 우월하고 유리하여 하서 제일 가는 도읍지입니다. 따라서 저거몽손은 이를 결코 차지하지 못할 것이므로 서둘러 구원해야 합니다." 독발리록고 또한 독발녹단의 말이 옳다고 여겨 그에게 기병 10,000명을 주어 말제 여륭을 돕게 했는데, 독발녹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저거몽손은 여륭과 맹약을 체결하고 철수했다. 독발녹단은 양택(涼澤), 단총(段冢)의 후량 백성 500여 호를 데리고 귀국했다. 이후, 일전에 항복했던 위안(魏安)의 초랑이 후진과 내통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발리록고는 독발녹단을 보내 토벌하도록 했다. 초랑이 스스로 면박해 위안성에서 나와 항복하자 그를 서평으로 호송하고, 그 백성들을 낙도(樂都)로 이주시켰다. 동년(402) 3월, 독발리록고는 재위 4년만에 병세가 대단히 위중해졌다. 그는 동생 [[독발녹단]]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곧 병사했다. 독발리록고는 서평군 동남쪽에 안장되었으며, 시호는 강왕(康王)이라 했다. == 둘러보기 == ||<-5><:><#E34234> '''[[남량|{{{#ffffff 남량의 역대 황제}}}]]''' || ||<:> 초대 열조 무왕 [[독발오고]] ||<:> {{{+1 ←}}} ||<:> '''2대 강왕 독발리록고''' ||<:> {{{+1 →}}} ||<:> 3대 경왕 [[독발녹단]]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40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