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2> [[파일:external/www.fisheaters.com/dominic.jpg|height=430]] || [[파일:St Dominic-FounderSaint-FCP-s.jpg]]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모셔진 전신상 [[라틴어]]: Sanctus Dominicus [[영어]]: Saint [[도미니크|Dominic]] [[프랑스어]]: Dominique [[스페인어]]: Santo Domingo de Guzmán [[가톨릭]]의 [[수도자|수사]][[신부(종교)|신부]]이자 [[성인(기독교)|성인]]. 축일은 [[8월 8일]][* 최초에는 8월 6일이었는데 "주님의 거룩하신 변모 축일" 때문에 후에 이틀 뒤인 8월 8일로 변경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 == 초기 생애와 활동 ==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1170년 [[스페인]] 카스티야, 칼레루에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지만 1~2년 후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영주(중세)|영주]]였고, 어머니는 그 지방의 귀족 출신이었다. 팔렌시아에서 공부한 뒤, 1196년경 오스마 주교좌 성당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채택한 의전 사제단[* 이때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접한 경험이 후에 수도회를 창설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에 가입하여 몇 년 뒤 부원장이 되었다. 1203년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가 궁정 선교단의 일원으로 덴마크에 파견되었을 때, 도미니코도 함께 갔다. 도미니코는 이 여행을 통해 처음으로 남[[프랑스]]에서 이단 알비파와 [[카타리파]]가 교회에 가하고 있는 위협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이단자들은 [[선]]과 [[악]]이라는 2가지 최고 존재가 각각 영혼과 물질을 지배하고 있으며[* 기독교 내부에서는 흔히 [[영지주의]]라고 부른다.], 먹고, 마시고, 출산하고, 세상의 물건을 소유하는 육체와 관계된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이런 육에 관련된 일과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마니교]]의 교리를 부활·발전시켰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철저히 금욕생활을 하는 '완전한' 계층이 생겨난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야훼|하느님]]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체계가 잡힌 알비파 성직 위계제가 생겨났고, 지방의 봉건영주들, 특히 툴루즈의 백작은 알비파를 지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막을 것을 호소했다. 2번째 여행에서 도미니코와 디에고 [[주교]]는 [[교황]]을 방문했으나, 교황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으므로[* 1203년에 이미 시토회 회원들이 설교 권한을 받아 출발한 상태였기 때문에 거절된것.] 그들은 [[프랑스]]로 돌아갔다. 1206년 교황의 사절과 설교자들이 복음 전파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해져서 [[주교]]와 도미니코에게 의논하러 왔을 때, [[주교]]와 도미니코는 그들도 자신들처럼 맨발로 길을 걷고 청빈한 생활을 하는 등의 금욕적인 실천[* 일부 당시 자료와 [[도미니코회]]의 측의 이야기에 따르면, 시토회가 설교를 위해 너무 많은 재산들을 준비해 갔기 때문에, 당시 가난했던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는 바람에 설교에 실패했다고 한다.]을 해야만 이교도를 개종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도미니코의 '복음 전파 설교' 의 시초이다. 그는 1206년 이교에서 개종한 한 무리의 여성들로 구성된 [[수녀원]]을 프루예에 설립했는데, 이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1208년 교황사절 '카스텔노의 베드로' 가 툴루즈의 백작이 보낸 밀사에 의해 살해되자[* 도미니코회 2대 총장인 복자 삭소니의 죠르단의 기록에 따르면 카스텔노의 베드로의 죽음은 도미니코회가 전혀 원하진 않던 전환점이었지만 정작 그가 암살 당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았다고 한다. 교황대사가 매일같이 공공장소에서 이단자들을 도발했기 때문.][* 미국 출신 도미니칸 William A. Hinnebuch가 저술한 'The Dominicans : A Short History'에 따르면 당시 반응은 거진 "언젠간 암살 당할 줄 알았는데 진짜 암삼당했네;" 급.], [[교황]]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군주들에게 전쟁을 시작하도록 요청했다. 교황 측 지도자는 [[프랑스]] 왕의 신하 몽포르의 시몽이였고, 알비파의 지도자는 툴루즈의 백작이고, [[프랑스]] 왕의 적대자이며 [[잉글랜드]] [[존 왕]]의 처남인 아퀴텐의 영주 레몽 6세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도미니코의 활동은 프루예 지역에 국한되긴 했지만 계속되었고 마침내 다른 6명이 더 가담했다. 오랫동안 끌어온 전쟁은 1213년 뮈레에서 시몽의 승리로 끝났다. [[가톨릭]] 세력이 툴루즈에 입성했고, 도미니코와 그의 친구들은 [[주교]] 마르세유의 풀케의 환영을 받았으며 1215년 [[주교]] 설교자로 선정되었다. == [[도미니코 수도회]][* [[도미니코 수도회]]의 별칭은 Domini canis이다. 라틴어로 '주님의 개'라는 뜻이지만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을 뜻하는 라틴어 표현 Dominicani를 의도한 말장난이기도 하다.] == 그해 폴케 드 마르세유의 헌장을 보면 설교에 중점을 둔 도미니코의 [[수도회]] 계획은 급격하게 발전했는데, 이 계획의 특징은 회원들에게 신학적인 기반을 형성해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도미니코는 회원들을 [[영국인]] 알렉산더 스타벤스비가 툴루즈에서 하는 강의에 데리고 갔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가하는 폴케 드 마르세유와 [[로마]]에 가서 그의 계획을 [[교황]]에게 제출했으나, 교황은 현존하는 [[수도회]]의 회칙 가운데 하나를 채택하도록 권유하면서 "수도회가 아니라 기존의 규칙서를 채택한 설교단을 창설하고 싶다" 는 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권유했다. 도미니코에는 불행하게도 그가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을 금지하기로 한 법령이 비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도미니코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만났다고 한다. 이 두 성인의 우정을 통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모두 강력한 전통을 형성했다. 1216년 여름 도미니코는 16명의 동료들과의 회합을 위해 툴루즈로 돌아갔다. 이 회의는 ' 창립회'(capitulum fundationis)라고 부르며 부분적으로 정식 교회법에 근거를 둔 성직, [[수도원]] 생활, 종교적인 청빈에 관한 일련의 '규범'(consuetudines)과 성 [[아우구스티노]] 회칙을 채택했다. 이들은 지금도 [[도미니코회]] 회칙의 핵심을 이룬다. 1216년 7월 [[인노첸시오 3세]]가 세상을 떠나자 도미니코는 다시 [[로마]]로 갔는데, 결국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도미니코회]]에 대한 공식승인을 받았다 (1216. 12. 22). 도미니코는 그의 이상을 구상하고 수도회원들을 그의 이상에 따라 단련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명료한 비전의 제시[* 그의 회원들의 지역배치와 정확한 수도회칙의 세부규정들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명령, 정확한 집행 등 뛰어난 지도력이 있었고, 성격이 온화해서 그에게 이야기하러 온 사람, 심지어 책망을 하러 온 사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남은 생애를 산시스토 교회가 있는 [[로마]]에서 살았고, 많은 시간을 여행을 하며 보냈다. 1218~19년 로마에서 툴루즈와 스페인으로 갔다가 다시 [[파리(프랑스)|파리]]와 [[밀라노]]를 거쳐 로마로 되돌아오는 긴 여행[* 약 5442 km를 완전히 걸어서 여행함.]을 했고, 1220년에 롬바르디아를 여행했다. 어디서나 그가 세운 수도원은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프랑스]]와 북[[이탈리아]] 주요지역에 새로이 많은 [[수도원]] 설립을 계획했다. [[로마]]에서 [[교황]]은 그에게 다양한 수녀회를 개혁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는데, 1221년 도미니코는 마침내 수녀들을 산시스토에 모았다. 그때 수사들은 [[도미니코회]] 총본부가 있는 산타사비나로 옮겨갔다. 1220년 오순절에 첫 번째 총 수도회 참사회의가 볼로냐에서 열렸고, 민주적인 대표행정체계가 고안되었다. 도미니코는 이 회의에서 원치않았지만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곧 건강을 이유로 사퇴했다. 2번째 총회도 1221년 오순절에 볼로냐에서 열렸으며 수도회는 지역적으로 여러 관구로 나누어졌다. 도미니코는 1221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뒤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성 도미니코가 그의 주변에서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남긴 소중한 마지막 예언은 이러하다. "서로 서로 형제들 간에 사랑하여라. 겸손하여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여라." == 창작물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도미니코/도미니코.png|width=100%]]}}} ||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 능력치는 정치 63, 전투 21, 지모 74. 내정특기는 건설과 외교/등용을 가지고 있다. * [[도미니크#s-2|Dominique]]: 잔 데케르의 샹송 [[분류:1170년 출생]][[분류:1221년 사망]][[분류:가톨릭 성인]][[분류:성공회 성인]][[분류:루터교회 성인]][[분류:도미니코회 수도자]][[분류:가톨릭 수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