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덕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include(틀:당나라의 상서령)]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1e1e1d,#2d2f34" '''{{{#000 돌궐 제21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9대 황제[br]{{{+1 덕종 문황제 | 德宗 文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ang_Dezong.jpg|width=100%]]}}} || ||<|2> '''출생''' ||[[742년]] [[5월 27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대내 동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779년]] [[6월 12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장안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805년]] [[2월 25일]] (향년 62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 회령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숭릉]](崇陵) || ||<|4>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764년]] [[2월 23일]] ~ [[779년]] [[6월 12일]] || ||'''{{{#ece5b6 제9대 황제}}}'''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4EEB0; font-size: .9em" {{{#1e1e1d,#2d2f34 '''제21대 가한'''}}}}}} || ||[[779년]] [[6월 12일]] ~ [[805년]] [[2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괄(适) || || '''부모''' ||부황 [[대종(당)|대종]][br]모후 [[예진황후]] || || '''형제자매''' ||20남 20녀 중 장남 || || '''배우자''' ||소덕황후 || || '''자녀''' ||11남 11녀 || || '''작호''' ||봉절군왕(奉節郡王)[br]→ 노왕(魯王) → 옹왕(雍王) || || '''묘호''' ||'''[[덕종]](德宗)''' || || '''존호'''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 || || '''시호'''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 || || '''한호''' ||천가한(天可汗) || || '''연호''' ||건중(建中, [[780년]] ~ [[783년]])[br]흥원(興元, [[784년]])[br][[정원(연호)|정원]](貞元, [[785년]] ~ [[805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 당[[대종(당)|대종]] 이예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예진황후 심씨였다. 휘는 괄(适)이었으며, 묘호는 [[덕종]](德宗)이었고, [[시호]]는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로 줄여서 효문제(孝文帝)라고 했다. 능호는 숭릉(崇陵)이다. 후대의 [[헌종(당)|당헌종]]과 함께 대표적인 [[중흥]] 황제였다. 그의 치세를 흔히 '''중흥의 치'''라 부르는데, 연호인 건'''중'''(建中, 780년 ~ 783년)과 '''흥'''원(興元, 784년)에서 글자를 딴 것이지만 한자를 읽으면 마침 '중흥'과 음과 뜻이 겹치는 우연의 일치가 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양세법]]''' 등의 세제 개편으로 연호를 따 '중흥의 치'라는 번영을 회복했으나 '''[[환관]]을 중용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리고 "중흥의 치"에서 드러나듯 정원 연간, 즉 재위 기간의 후반 9년은 전반 5년에 미치지 못했다. 대내적인 평가는 번진에 집착해서 큰 공을 놓쳤고, 대외적인 평가는 위구르에 집착해 토번에게 이용당했다고 요약된다. 그러나 이 황제가 자기 듣기 싫어하는 간언을 크게 싫어하고, 듣기 좋아하는 간신들을 많이 좋아한 단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환령인 줄 알았다는 주변 관료들의 질타까지 있었을 정도. 그러다보니 이림보 하위호환인 노기[* 권모술수와 아부는 이림보에 뒤지지 않았으나, 행정 능력이나 체제 유지하는 능력은 이림보만 못했다.]에게 행정에 능한 관료들이 억울하게 쫓겨나 중앙 정치와 재정이 혼란해졌다. 때문에 처음에 각 잡고 정부 기강을 유지하고 번진들을 족치자 이정기의 평로치청 번진을 비롯한 여러 번진이 긴장하고 번진 내 장병들마저 동요했으나,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후하고 안드는 인간에겐 가혹하거나 꽁한 특유의 이상한 성격이 밝혀지자 점차 깔보이게 되었다. 그나마 뭔가 상황이 크게 안 좋게 돌아간다 싶으면 간언을 받아들이고 뉘우치는 조치를 하긴 했다는 게 환령보다 그나마 나았던 점. 환령은 그런 순간에 간언하는 자를 쫓아냈고 수양제는 아예 죽였으나, 이 황제들의 사례를 잘 아는 당덕종은 그러지 않았다는 차이 정도. 생각보다 상황파악하는 눈치는 나쁘진 않은 편이었다. 굳이 말하면 환령 상위호환이었라고 보면 되겠다. 당덕종은 당나라의 황제가 유목세계에서 '[[가한|천가한]]'으로 불리던 마지막 군주로 추정된다. 물론 사서의 기록상으로는 선제인 대종이 위구르가 침공할 당시 불리운 것이 마지막이다. 다만 덕종 시대까지 위대한 명장 [[곽자의]]가 아직 살아있었기에, 덕종 즉위 당시에도 천가한의 권위는 아직 남아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덕종 말년의 혼란기 이후 주변 어느 민족도 더이상 당나라의 황제를 '천가한'으로 호칭하지 않았음이다. == 생애 == === 황제 즉위 이전 === 증조부인 [[현종(당)|현종]] 치세에 태어났다. 어머니 예진황후 심씨는 [[안사의 난]]때 피난 도중 혼란 속에 실종되어 영영 찾지 못했다. 젊었을 때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위구르군과 연합 작전을 펼칠 때 당한 치욕으로 [[위구르 제국]]에 대한 복수심이 매우 컸다. 위구르에게 당한 치욕이란 [[당나라]]가 [[사사명]]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위구르의 [[뵈귀 카간]]이 당시 옹왕이었던 덕종에게 >"나와 네 [[아버지]]는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나는 너의 숙부다. '''숙부인 가한을 위해 직접 춤을 추라'''." 라는 참담한 모욕을 가했고, 이에 반대하던 당나라의 신하들이 분노한 카간에게 채찍 100대를 맞다가 죽어나가는 수모를 경험했으며, 동도 [[낙양]]이 재수복되자, 위구르군이 대약탈극을 벌여 수만 명의 무고한 백성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 것이었다. === 치세 - 양세법 === 덕종의 가장 큰 업적은 즉위 직후(780년) 재상 [[양염(당나라)|양염]](楊炎)의 건의에 따라 [[중국사/세금 제도#s-11|세금제도]]를 개편하여 단일 세율(단세)인 '''[[중국사/세금 제도#s-11|양세법]]'''(兩稅法)을 도입한 것이었다. [* 여기서 '나가는 것을 헤아려 들어오는 것을 정한다'라는 뜻인 '''양출제입'''(量出制入)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무릇 백역에 드는 비용과 한 푼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들은 먼저 그 수를 헤아려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지출할 것을 잘 따져서 수입 계획을 세운다'''(凡百役之費, 一錢之斂, 先度其數而賦於人, '''量出制入''')" ─ 《신당서》 <양염전> 中.] [[균전제]]를 폐지하고, 현재의[* 이는 본관지의 이탈을 용인한 것이며, 소작민을 과세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토지와 재산에 따라''' 세금을 해마다 두 번[* 여름(하세) - 6월, 가을(추세) - 11월] 금전으로 걷고[* 정확히 말해서 여름에 걷는 것은 '''맥(麥)전''', 즉 [[보리]]농사, 가을에 걷는 것은 '''속(粟)전''' 및 '''도(稻)전''', 즉 [[좁쌀]]농사와 [[벼]]농사를 걷는 것이니 [[이모작]]을 때에 따라 각각 걷는 것이지 이중과세는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정된 양세법은 이후 '''[[명나라]] 신종 [[만력제]] 때까지 800년간이나 운용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양세법의 기본 원칙은 하급 행정 단위에서 쓰고 남은 돈을 상부로 올리는 방식이었던 만큼, 하북 3진은 물론 평로 절도사조차 '''상공'''(上供 - 중앙으로 세금을 바치는 것)을 아예 하지 않았고, 나머지 절도사들도 이따금 매우 적은 상공만을 했다. 조금 사정이 나은 것이 [[강남(중국)|강남]]의 순지(順地) 절도사들이었는데, 이것도 [[대운하]]를 통해서 상공이 가능한 것이었기에 하북의 절도사들이 막을 경우, 정기적이지 못했다. 이는 뒤에 보듯 [[이정기]]의 치청번진([[제나라]])과 같은 절도사들의 반란에서 잘 드러난다. === 절도사들의 봉기와 반란 진압 === 절도사들의 세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덕종은 성덕절도사 이보신이 죽자 그의 아들인 이유악이 절도사를 세습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에 '''이유악''', 위박절도사 '''전열''', 산남동도절도사 '''양숭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 이정기는 반란이 시작될 때쯤에 죽었으므로 사실상 그의 아들인 '''이납'''이 반란을 이끌었다.]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4진의 난'''이 시작되었다. 덕종은 장안의 조정에 협력하는 각 번진의 군대를 동원해 산남동도의 양숭의와 성덕의 이유악을 손쉽게 토벌하며 반란군을 사방에서 압박해나갔다. 그러나 이후 논공행상 문제로 불만을 품은 성덕의 '''왕무준''', 노룡절도사 '''주도'''가 도로 반란군 편에 붙어버리고[* '''4진'''이라고 하면 보통 '''위박''', '''성덕''', '''노룡'''의 하북 3진과 '''평로치청번진'''을 말한다.] 양숭의를 토벌했던 회서절도사 '''[[이희열]]'''까지 덩달아 반란을 일으키자 전황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덕종이 이 시기부터 간신 노기에게 휘둘리고 능력 있는 신하들을 쳐내기 시작하면서 정치 질서가 크게 문란해져 깔보이는 단초까지 제공하게 된다. 덕종은 반란군을 막으려고 경원에서 병사들을 징집해 수도 장안으로 불러들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이 병사들이 자신들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덕종은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파천했으며, 경원절도사 '''요령언'''은 노룡절도사 주도의 형인 '''[[주차(당나라)|주차]]'''에게 의탁했다. 주차는 이 반란군들을 흡수한 뒤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기에 이르렀다.('''주차의 난''') 사실 주차가 의외로 옹립되는 것을 마뜩치 않아 했고 당나라 종묘를 훼손하라는 건의도 물리치긴 하였으나, 생각보다 많은 수도 관료가 주차에게 남았다. 덕종의 정치가 꽤나 엉성했다는 의미로, 당현종 또한 말년에 몇몇 총신에게 휘둘려 정치가 문란해졌는데 당덕종도 그러했던 것이다. 다만 당현종은 이룬 업적이라도 커서 방심했는지 이 사람은 그런 경우도 아니었다. 그냥 거슬리는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아부에 약한 증상이 다른 황제들에 비해 심했을 뿐.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동쪽의 반란군을 막다가 장안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러 급히 달려온 삭방절도사 '''이회광'''까지 두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후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이회광의 난''') 이회광마저 끝내 간신 노기를 내치지 않는 황제를 압박해 노기를 해임하게 했을 정도로, 아부하는 신하를 그 순간까지도 포기를 못했다. 이렇게 사방에서 절도사들이 중앙 조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덕종은 결국 '''<죄기조>'''를 반포해 반란군을 사면하고 절도사 세습을 인정해주기로 약속했다. 이에 회서절도사 이희열, 장안을 점령한 주차, 주차의 동생인 노룡절도사 주도를 제외한 절도사들은 반란을 멈추고 다시 당 조정에 신종했다.[* 이회광이 확실히 반란을 일으킨건 이 시점 이후다.] 부담을 던 덕종은 [[이성]]과 혼감의 활약에 힘입어 결국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장안도 탈환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토번]]의 지원군을 끌고 왔으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반발이 생겨 결국 토번과 결별하게 되었고, 이필의 건의로[* [[당숙종]]의 그 이필 맞다.] [[위구르]] 제국과 연합해서 토번을 공격했으나 '''되레 깨져서 그나마 소유하고 있었던 북정 지역마저 상실당했다.''' 이후 중국의 한족 왕조는 두 번 다시 서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당나라]]가 [[위구르]]와 연합해서 [[토번]]을 쳤으나 토번이 장군 줘치수를 통해 오히려 반격을 가해 안서도호부의 치소인 북정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위구르가 서역의 주요 거점인 북정성을 힐우가사를 통해 다시 공격하여 탈환했고, 최종적으로 북정은 위구르의 영토가 되었다.] 그래도 이 시기 이후에는 정신 차려서 제대로 통치했다. 그러나 놓쳐버린 번진 제압 기회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 붕어 === 덕종은 805년에 64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며 능호는 숭릉(崇陵)이었다. == 기타 == * 전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했다.[* 덕종은 자신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전란에 휩싸여 고생한다며 모든 것이 자신의 죄라 여기고 ‘<죄기조>'(罪己詔)를 발표했다.] 사실 그가 전란의 원인도 아니었는데... [[6.25 전쟁]] 때 수도 [[서울]]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은 사과하라는 [[제2대 총선]]으로 수립된 [[국회]]의 비판에 "내가 무슨 당덕종이냐! 나는 못 하니, 하려면 당신들이나 하라!"라고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이기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서울 시민들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 당덕종 재위기간에 [[낙산대불]]이 완공되었다. [[낙산대불]]은 [[현종(당)|당현종]] 개원 원년인 713년, 해통화상(海通和尚)이 처음 공사를 시작하여 당덕종 정원 19년인 803년에서야 겨우 완공되었는데 무려 90년에 걸쳐 [[사천성]] 민강 강가 절벽에 조각되었으며 높이 71m, 폭 28m, 머리 너비만 해도 10m에 이를 정도로 현존 세계 최대 좌[[불상]]이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792년에 [[신라]] 최고의 미녀인 [[김정란]]을 [[공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외에 [[신라]]의 [[소성왕]]이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당나라에 바쳤는데 덕종은 "이거 인삼이 아닌데?"라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 대중매체에서 == 2017년 드라마 대당영요에 덕종의 어린 시절이 잠깐 등장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당시기사)]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각주] [[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742년 출생]][[분류:805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