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3> {{{#683235 {{{+1 '''덕수궁 포덕문'''}}}[br]{{{-1 德壽宮 布德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서울광장, 너비=100%, 높이=100%)]}}} || ||<-2> {{{#68323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5-1) || ||<-2> {{{#683235 '''건축시기'''}}} || [[1896년]] 추정 {{{-1 (창건) }}} / [[1912년]] {{{-1 (이건) }}}[br] / [[1954년]] 이전 {{{-1 (철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포덕문.png|width=100%]]}}} || || {{{#683235 '''1919년 고종황제 장례 당시 포덕문(가운데). 왼쪽의 큰 문은 대한문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포덕문 현판.png|width=100%]]}}} || || {{{#683235 '''포덕문 현판[* [[https://www.gogung.go.kr/specialView.do?cultureSeq=00017926EO|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목차] == 개요 == [[덕수궁]]의 궁문으로 동북쪽 담장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현재의 덕수궁 동북쪽 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담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서쪽으로 물린 것으로, 포덕문 자리는 현재 [[태평로(서울)|태평로]] 한복판이다. == 이름 == 포덕 뜻은 ‘덕(德)을 널리 베푼다(布)’이다.[[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6345§ionId=ocp&pageIndex=1&mn=&strWhere=&strValue=&sdate=&edate=|#]] ‘포(布)’는 직역하면 ‘[[베]]’인데, ‘넓게 펼쳐 베푼다’로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했다. == 역사 ==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덕수궁 즉조당|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1년 뒤 1897년(건양 2년) 궁으로 돌아갈 때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환궁을 경운궁으로 하려고 했는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공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공사|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 포덕문도 지은 듯 하다. 확실한 건립 연대는 모르나, 1896년([[건양]] 원년) 9월 13일[* 음력 8월 7일.]에 김철희를 포덕문 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그 무렵 완공한 듯 하다.[[http://sjw.history.go.kr/id/SJW-K33080070-00300|#]]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종묘]] 등 궁 밖에 나갈 때 주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태평로(서울)|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덕수궁 동쪽 담과 포덕문을 서쪽으로 후퇴시켜 옮겨지었다. 현재는 없으며 언제 헐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1954년에 동국문화사에서 발행한 이철원이 지은 책 《왕궁사》에 실린 〈덕수궁지도〉에는 안보이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철거한 듯 하다. 헐린 후 [[현판]]은 쌩뚱맞게 덕수궁 서문에 걸렸다. 이 현판은 2010년 11월 이전에 떼어냈고[* 2010년 11월에 [[카카오맵]]에서 촬영한 사진에는 현판이 안보인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 서문.png|width=100%]]}}} || || {{{#683235 '''평성문 자리 북쪽에 새로 지은 덕수궁 서문[*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 구조 == 1칸 짜리 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중앙 열에 문짝을 달았다. == 여담 ==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독립협회]] 대표인 [[윤치호]] 외 4명과 [[황국협회]] 대표인 [[홍종우]] 외 4명을 만나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곳이 포덕문 앞이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2060023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2-06&officeId=00023&pageNo=2&printNo=2836&publishType=00020|#]] * 1899년([[광무]] 3년)에 황의수란 사람이 포덕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처소인 [[덕수궁 함녕전|함녕전]]까지 가서 “나는 [[천주교|서교]]를 널리 선전해 [[천자]]가 될 것이다.”란 말을 해서 체포되었고,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천주교]], [[개신교]]의 [[포교]]가 허용받은 지 한참 지난 시기라 그 죄목으로 [[처형]]당한 건 아니었다. '''궁에 무단 침입'''해 '''황제의 침전'''에서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고 한 게 문제.[[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7001_004|#]] --빼박 역적 인증--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덕수궁 인화문, version=35)]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