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683235,#683235 '''덕수궁 금천교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덕수궁)]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금천교)] ---- [include(틀:조선 왕궁의 금천교)] }}} ||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3> {{{#683235 {{{+1 '''덕수궁 금천교'''}}}[br]{{{-1 德壽宮 禁川橋}}}}}}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덕수궁 금천교, 너비=100%, 높이=100%)]}}} || ||<-2> {{{#68323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5-1) || ||<-2> {{{#683235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1 ([[1897년]] / [[1902년]] 추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 금천교.png|width=100%]]}}} || || {{{#683235 '''금천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_금천교.jpg|width=100%]]}}} || || {{{#683235 '''금천교 야경[*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5661&ccbaKdcd=13&ccbaAsno=012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덕수궁]]의 [[금천교(왕궁)|금천교]]이다. [[금천교(왕궁)|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암석|돌]][[교량|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했다.]와 외부와의 [[경계]][*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귀신|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금천교 역시 [[덕수궁]]의 정문인 [[덕수궁 대한문|대한문]]과 중문인 [[덕수궁 조원문|조원문]][* 현재는 헐리고 [[터]]만 남았다.] 사이에 있다. == 역사 ==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 타 [[월산대군]][* [[성종(조선)|성종]]의 형.]의 사저를 중심으로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쓴 임시 [[행궁]]이었다. 더군다나 [[인조]] 이후에는 [[덕수궁 즉조당|즉조당]] 및 그 부속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어준 후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궁]]이었다. 그러다 [[1890년대]] 후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이 곳으로 [[이사|이어]]한 후 비로소 제대로 [[정문]], [[중문]], [[집|침전]], [[편전]] 등을 지었다. 그 때 [[금천]]도 팠고 [[금천교(왕궁)|금천교]]도 세웠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 금천교 원래 자리.png|width=100%]]}}} || || {{{#683235 '''초창기 덕수궁 금천과 금천교 자리'''}}} || [[대한제국]] 초기 [[덕수궁]]의 [[정문]]은 [[덕수궁 인화문|인화문]]이었고 [[중문]]은 돈례문, [[정전#s-6|정전]]은 지금의 [[덕수궁 즉조당|즉조당]]인 태극전[* 중간에 중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02년 2층의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이 되었다.]이었다. 그래서 [[금천]]과 [[금천교(왕궁)|금천교]]는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있었다. 지금의 [[덕수궁 중화전|중화전]] 마당이다. 약 3년을 그렇게 있다가 1901년([[광무]] 5년)에 제대로 된 [[정전#s-6|정전]]이 필요하여 [[덕수궁 중화전|새로운 중화전]]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지의 부족으로 [[덕수궁]] 영역을 남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덕수궁 인화문|인화문]]을 헐고 사람들의 통행이 잦던 동쪽의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1906년 이름이 [[덕수궁 대한문|'대'''한'''문']]으로 바뀐다.]을 [[정문]]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대안문과 새 중화전 사이에 [[중문]] [[덕수궁 조원문|조원문]]을 지었으며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롭게 [[금천]]을 팠고 [[금천교(왕궁)|금천교]]를 놓았다. 이 때 금천교 다리를 옮긴 건지, 새로 지은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oswOWyVFho)]}}} || || {{{#683235 '''덕수궁 금천교 복원 내용을 다룬 〈대한뉴스〉 제 1592호'''}}} ||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차량]]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다. [[8.15 광복]] 후인 1986년에 발굴한 뒤 원래 자리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단, [[대한문]]을 1970년에 서쪽으로 14m 정도 이전했기 때문에 현재 대한문과 금천교가 거의 붙은 모습이다. == 금천 == [[금천교(왕궁)|금천교]] 밑을 흐르던 [[덕수궁]]의 [[금천]]은 '''‘정릉동천(貞陵洞川)’'''이다. 물줄기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옛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 근처에서 발원하여 정동 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다른 한 갈래는 지금의 [[삼성플라자]] 부근에서 발원하여 [[세종대로]]를 따라 흘렀다. 두 물길은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서 만났다. 합류한 물줄기를 약간 틀어 덕수궁 경내를 지나게 했으며, 이를 금천으로 삼았다. 이 물은 지금의 [[서울시청]] 앞 쪽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인화문]]이 [[정문]]이던 시절에도 정릉동천을 [[금천]]으로 사용했다. 그 때는 정동 길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바로 [[덕수궁]] 경내로 끌어들였다. [[금천]] 역시 일제가 금천교와 함께 묻었다가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1986년에 금천교와 같이 [[복원]]했다. 그런데 정말 흉내만 냈기 때문에 마치 웅덩이같다. 축대도 측면은 [[암석|돌]]로 쌓았지만 바닥은 [[시멘트]]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는 [[거북이]] 조각상까지 배치해놓아서 사람들은 거북이 수영장이란(...) 소리까지 했었다. 그래도 시멘트가 훤히 보이는게 좀 그랬던지 최근엔 [[자갈]]을 깔아놓았다. --아니 제대로 돌 깔아서 복원을 하라고!-- 당연히 물도 흐르지 않으며 만약 [[금천]]에 물이 차있는 걸 봤다면 이는 [[비(날씨)|비]]온 뒤 고인 물일 가능성이 크다. 정릉동천은 현재 도랑 시늉이라도 나있는(...) [[덕수궁]] [[금천]]을 제외하고 전부 덮혔다. == 구조 == *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암석|돌]][[길]]을 놓았다. 이 길의 너비는 [[마차]] 2대가 지나갈 만할 정도로 굉장히 넓다.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딱 봐도 어도의 높이가 양 옆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높다. * [[교량|다리]] 윗 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2개의 [[암석|돌]]로 된 엄지기둥[* [[계단]]의 맨 밑이나 계단참 또는 꼭대기에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7개의 [[난간]]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난간을 고정하기 위해 단면이 8각형인 긴 돌을 얹었다. 기둥 머리 부분은, [[모래시계]] 형태의 가운데를 작은 [[구슬]]로 장식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봉오리]]를 얹었다. 난간의 형태는 연꽃봉오리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 기둥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외에는, 다른 [[궁궐]]의 [[금천교(왕궁)|금천교]]와는 다르게 [[서수]] [[조각]]을 포함한 어떠한 [[장식]]도 없다. 그리고 높이도 다른 금천교에 비해 굉장히 낮다. 처음부터 [[제국]] [[궁전|황궁]]의 금천교로 지은 [[덕수궁]]의 다리가 [[왕국]] [[왕궁]]의 금천교보다 초라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 [[교량|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건축)|아치]][* [[한국 건축|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를 2개 만들었다. 아치를 받치는 [[암석|돌]]을 선단석이라 하는데, 선단석은 전부 [[금천]] 바닥 밑에 있어 밖에선 볼 수 없다. == 여담 == [[교량|다리]] 앞에 [[비석]]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있다. ‘누구던 다 [[말(동물)|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인데, 아마 후대에 어디 굴러다니던 걸 그냥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하마비는 [[관료]]들이 [[궁궐]]에 들어갈 때 [[가마(탈것)|가마]]나 말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서 반드시 내려야 하는 지점을 나타낸 비석이라 궐 밖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분류:덕수궁]][[분류:금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