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3> {{{#683235 {{{+1 '''덕수궁 광명문'''}}}[br]{{{-1 德壽宮 光明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덕수궁 광명문, 너비=100%, 높이=100%)]}}} || ||<-2> {{{#68323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5-1) || ||<-2> {{{#683235 '''건축시기'''}}} || [[1897년]] {{{-1 (창건) }}} / [[1904년]] {{{-1 (중건) }}}[br] / [[1938년]] {{{-1 (이건)}}} / [[2019년]] {{{-1 (이전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_광명문.jpg|width=100%]]}}} || || {{{#683235 '''광명문[*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5660&ccbaKdcd=13&ccbaAsno=012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이다. 위치는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의 남쪽이며, [[정문]]인 [[덕수궁 대한문|대한문]]과 [[정전]]인 [[덕수궁 중화전|중화전]] 사이이다. == 역사 ==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디 [[성종(조선)|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조선)|선조]]가 잠시 머물던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이후엔 왕들의 흔적이 서린 [[덕수궁 즉조당|즉조당]][* [[선조(조선)|선조]]가 머물고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과 주변 몇 채 정도만 뺀 나머지 [[건물]]들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어있었다. 그러나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환궁[*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을 경운궁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건 공사를 명하여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연히 [[임금]]이 머물 정식 침전 역시 필요했고 그에 따라 1897년([[건양]] 2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을 건립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 광명문 본모습.png|width=100%]]}}} || || {{{#683235 '''고종 생전의 광명문 모습'''}}} || 이 때 [[덕수궁 함녕전|함녕전]]만 지은 것이 아니고 당연히 주변에 에워쌀 행각과 [[문]]도 같이 세웠다. 함녕전의 남쪽 행각을 이중으로 만들었고 바깥 행각에 [[정문]]을 지었으니 이것이 광명문이다. 건립한 지 불과 7년만인 1904년([[광무]] 8년)에 [[덕수궁 함녕전|함녕전]] [[온돌]]을 [[수리]]하다 대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고[* 이 때 광명문 뿐 아니라 주요 건물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종 장례 광명문.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행각 헐린 광명문.png|width=100%]]}}} || || {{{#683235 '''고종 장례식 때 광명문을 통과하는 상여'''}}} || {{{#683235 '''양 옆 행각이 헐린 광명문'''}}} || 1919년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죽음|세상을 떠나자]] [[덕수궁]]은 빈 [[궁궐]]이 되었고,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들이 팔리거나 헐렸다. 광명문은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양 옆 행각이 철거당했다. 그리고 1938년에 [[일본 제국|일제]]가 [[미술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흔히 ‘[[덕수궁 석조전|석조전 서관]]’으로 부르는 건물이다.]을 개관하면서 건물 자체를 미술관의 남쪽으로 옮겼다. 이 때 [[벽|벽체]]와 [[문|문짝]]을 다 뜯어버렸다. 그리고 [[신기전|신기전 기화차]]와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를 보관 및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수십 년을 그 모습으로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흥천사명 동종.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전시관 광명문.png|width=100%]]}}}|| ||<-2> {{{#683235 '''전시소 시절의 광명문. 왼쪽은 현판 색이 바뀐 모습이고, 오른쪽은 원래 색을 찾은 모습이다.'''}}} ||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현판]]의 [[색]]마저 바뀌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였던 것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변했다. 이것은 [[문화재청]]에서 2016년에 본래 모습대로 [[복원]]해 교체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4AtPQHQKKFU)]}}} || || {{{#683235 '''광명문 이건 복원 준공식'''}}} || [[문화재청]]은 2018년 6월부터 그 해 말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이전]]하고, 없어진 벽체와 문짝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에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준공 기념행사'를 열어 일반에 개방했다. 이로써 광명문은 약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건하면서 기와도 공장제에서 수제로 교체했다. == 구조 == * 원형 [[초석|주춧돌]] 위에 [[원(도형)|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짜리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또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성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평방 없이 창방 위에 바로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를 놓은 형태로, 공포는 익공 양식이다. 그리고 공포 사이마다 화반 3개 씩을 두었으며 공포와 화반 사이의 틈을 [[벽]]으로 메꾸지 않았다.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으며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을 조금 더 넓고 높게 만들었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를 [[나무]] [[판]]으로 마감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으로 입혔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덕수궁 함녕전, version=55)]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