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왕자]][[분류:개성 왕씨]][[분류:고려의 후작]][[분류:고려의 공작]][[분류:고려의 공신]][[분류:1093년 출생]][[분류:1161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D00, #FFB200 20%, #FFB200 80%, #FF9D00)" '''고려 숙종의 왕자[br]고려의 제왕[br]{{{+1 대원공 왕효 | 大原公 王侾 }}}'''}}} || || '''출생''' ||[[1093년]]^^([[선종(고려)|선종]] 10년)^^ || || '''사망''' ||[[1161년]]^^([[의종(고려)|의종]] 15년)^^ [[5월 6일]]^^(음력 4월 10일)^^ (향년 69세) || || '''본관''' ||[[개성 왕씨]] || || '''휘''' ||효(侾) || || '''자''' ||경천(敬天) || || '''부모''' ||부왕 [[숙종(고려)|숙종]] 모후 [[명의왕후]]|| || '''형제자매''' ||[[숙종(고려)#가족관계|8남 4녀 중 5남]] || || '''배우자''' ||대원공비(大原公妃) 이씨[* 양간공(襄簡公) 이씨의 장녀] || || '''자녀''' ||'''1남 1녀''' 아들 - [[왕감(강양공)|강양공 왕감]] 딸 - 개성 왕씨[* [[왕재(수사공)|수사공 왕재]]의 부인] || || '''지위''' ||[[제왕#諸王]](諸王) || || '''작호''' ||대원후(大原侯) → '''대원공(大原公)''' || || '''시호''' ||장평공(莊平公) || || '''별호''' ||연덕궁왕자(延德宮王子)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제15대 국왕 [[숙종(고려)|숙종]]과 [[명의왕후]]의 5남. == 생애 == 정직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로 어려서부터 충효의 정성이 있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에 뜻을 뒀다. 이름을 받기 전 어렸을 때는 연덕궁왕자(延德宮王子)란 [[궁호]]로 불렸다. 숙종과 명의왕후는 대원공이 아들 중에서 효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해 대원공이 10세가 되던 해인 숙종 7년인 1102년 [[人]](亻)자에 [[孝]]자를 더해 효(侾)라는 이름을 내린다. 3년 뒤인 숙종 10년인 1105년 부왕이 승하하고 형 [[예종(고려)|예종]]이 즉위하는데, 아직 어렸던 대원공 왕효은 모후인 [[명의태후]]의 거처에서 지내게 된다. 예종 원년인 1106년 '봉의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수사도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후(奉義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保 守司徒 兼尙書令 上柱國 大原侯) 식읍 2천호 식실봉 3백호'에 오른다. 예종 2년인 1107년 [[윤관]], [[오연총]] 등이 원수가 되어 [[여진 정벌]]에 나선 때 대원공 왕효는 수도에 머무르며 왕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든다. 예종 3년인 1108년 검교태보(檢校大保)가 더해지고, 예종 5년인 1110년 책문을 받들어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오른다. 같은 해에 또 광효공신 수태위(廣孝功臣 守太尉)가 더해지자 대원공 왕효는 표문을 올려 사양하지만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종 7년인 1112년 모후인 [[명의태후]]가 승하하니 이듬해 [[명복궁]]사(明福宮司)의 토지와 노비 등을 상속받는다. 또 그 다음해인 예종 9년인 1114년 11월 [[태묘]]에 명의태후의 신주를 합사하는데 예종은 대원공 왕효에게 아헌(亞獻)[* 전통 제례의 순서에서 삼헌(三獻) 중 두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일.]이 되어 두 번째로 제사술을 따르게 한다. 같은 해 12월 수인공신(守仁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공작(작위)|공작]]으로 승진하여 식읍 3천 5백호, 식실봉 3백 5십호에 이르게 된다. 예종 10년인 1115년 3월 양간공(襄簡公)[* 기록에 양간공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왕실과 혼인한 것으로 보아 [[인천 이씨]]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이자연(고려)|이자연]] 또는 이자상(李子祥)의 손자 뻘일 것으로 보인다.]의 장녀 이씨를 공비(公妃)로 맞으면서 왕명을 받은 [[최홍재(고려)|최홍재]]를 통해 비단과 금은그릇, 말 등을 하사받는다. 대원공 왕효의 묘지명에 따르면 같은 해 7월에 검교태부(檢校大傅)가 더해지고 작위는 상공(上公)으로 한 단계 더 오르며 대읍(大邑)이 식읍에 더해진다. 예종 17년인 1122년 정월 수태보(守大保)에 오른다. 교서에 따르면 왕이 동생을 총애하는 뜻에서 작위는 [[오등작]]의 으뜽이지만 [[삼공]]의 지위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높은 관직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4월에 예종이 죽고 조카 [[인종(고려)|인종]]이 즉위한 뒤에 찬화공신(贊化功臣)의 호와 식읍 4천호, 식실봉 5백호가 하사되었고, 9월에는 검교태사(檢校大師)로 승진한다. 인종 즉위한 이후 외척 [[이자겸]]이 권세를 잡은 뒤로는 [[영남 지방]]으로 유배된다. 당시 형 [[왕보(대방공)|대방공 왕보]]도 개경에서 쫓겨난다. 대원공 왕효는 이자겸의 축출 이후 인종 7년인 1129년이 되어서야 왕의 소환으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봉순동덕수절찬화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겸 상서령 상주국(奉順同德守節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保 兼 尙書令 大原公)에 오르고 식읍 3천호 식실봉 4백호'를 하사받고, 왕으로부터 새 집과 금은그릇, 비단, 말 등을 받는다. 인종 11년인 1133년에는 부인인 공비 이씨와 사별한다. 대원공 왕효는 불교를 믿으면서도 도교에도 뜻을 두고 또 유교의 인의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원공 왕효는 [[유불선]] 각각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 글은 당시 [[흥왕사]](興王寺)의 교장보(敎藏寶), 도교 사원인 [[복원궁]](福源宮), 한림원이라고도 부르는 서적점(書籍店) 등에 붙는다. 이후 인종, [[의종(고려)|의종]] 재위 중 공신호와 식읍이 계속 더해져 최종적으로는 '봉의동덕광효수인찬화봉순수절수의좌리보정려익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사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공(奉順同德守節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保 兼尙書令 上柱國)'에 식읍 4천호 식실봉 7백호에 이른다. 의종 11년인 1161년 초 노환으로 사망해 광제사(廣濟寺)에 빈소가 마련된다. 장평공(莊平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경 동산(東山) 기슭에서 화장하고 인효불원(因孝佛院)에 임시로 안장 한 후 11월 임인일에 의룡산(義龍山) 동쪽 기슭에 매장된다. [[예종(고려)|예종]]의 동생들 중에선 가장 오래 살았다.[* 이에 비해 [[상당후|상당후 왕필]]은 일찍 사망했다.] == 가족관계 == 아들로는 [[왕감(강양공)|강양후 왕감]]이 있고, 손녀는 [[의종(고려)|의종]]의 아들인 [[효령태자]]의 태자비가 되었다. 딸은 [[정간왕|정간왕 왕기]]의 증손자 [[왕재(수사공)|수사공 왕재]]와 혼인해 외동딸을 뒀다. * 부인: 대원공비(大原公妃) 이씨[* 양간공(襄簡公) 이씨의 장녀] * 아들: [[왕감(강양공)|강양공 왕감]] * 며느리: [[덕녕궁주]] 왕씨[* [[인종(고려)|인종]]의 차녀] * 손녀: [[효령태자]]비 왕씨[* [[의종(고려)|의종]]의 아들 [[효령태자]]의 부인] * 딸: 개성 왕씨 * 사위: [[왕재(수사공)|수사공 왕재]][*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의 아들로 [[정간왕|정간왕 왕기]]의 증손자다.] * 외손녀: [[왕씨(1141)|왕재녀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