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만주의 역사)] [include(틀:발해부흥운동)]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발해부흥운동.png|width=100%]]}}}|| [목차] [clearfix] == 개요 == 대발해(大渤海)는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유민]]인 [[고영창]]이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대자가 존칭이므로 발해라 해도 무방하지만 역사적 구분을 위하여 굳이 대발해라 불리게 되었다. 대원국(大元國)이라고도 부른다. 1116년에 건국하여 총 '''5개월'''간 이졌다. 1116년 1월 1일 고영창은 군사를 몰고 [[거란족]] [[요나라]]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소보선(蕭保先)을 척살한 다음 대발해를 건국하였다. 멸망(926년) 후 거의 200년이나 지났는데도 발해의 기치 아래 사람들이 꽤 모였음을 알 수 있다. 고영창이 대발해를 건국하고 사용한 연호는 융기(隆基) 또는 응순(應順)이다. 고려사 등에는 융기로 표시되어 있지만 요나라 측 기록에서는 응순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자의 의미상 융기는 떠오르는 기세를 나타내나 응순은 순종한다에 가깝기 때문에 요나라측에서 융기를 용납하지 않고 멸칭으로써 응순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건국시에는 융기로 시작했다가 무언가의 변덕--무리한 외교가 초래한 위기라던가--으로 인해 그 지속기간 5개월 사이(...)에 응순으로 바꾼 것일 수도 있다.] 건국 10여일만에 요나라 동경도 관할하에 있던 요동의 79주 중 50여주를 지배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1116년 5월 요의 장수 장림(張琳)이 대발해를 공격하자 대발해는 당시 흥기하던 [[여진족]]의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금나라와의 지원군 협상에서 금나라가 고영창에게 요동에서 물러날 것과 칭제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황제]]를 고집하다가 건국 5개월만에 멸망해버린다. 금나라의 요구는 사실상 요동에서 물러나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인데 고영창이 들을 리가 없다. 같이 요동에서 발흥했던 [[흥료국]]과 비교하면 대발해는 흥료국에 비해 국가 체제도 갖추지 못했고, 원군이 되어줄 수도 있을 고려에게 오히려 자신에게 표를 올리라고 하는 등, 그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발해가 없어진지 200년이 넘었기 때문에 발해인 스스로의 정체성도 희미해졌고, 때문에 발해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이들도 발해유민 출신들이었다. 즉 대발해에는 국제적 안목과 발해유민들을 통합할 리더십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금의 장수인 알로(斡魯)가 고영창을 사로잡고 대발해를 멸망시켰다. 대발해는 '''[[발해부흥운동]] 최후의 나라'''로서 이후 발해인들은 금나라 여진족들의 강온책으로 말미암아 통혼을 하고 군대에 충원되는 한편, 강제로 중원에 이주당해 여진, 한족과 혼혈하여 상당수가 동화되었다. 그래도 남은 발해인들은 요동에 살고있었고 [[원나라]]가 고려왕족을 요동을 관리한 [[심왕]] 자리에 임명하고, 고려와 조선이 [[요동 정벌]]을 계획할 정도로 명나라 초기까지도 동화되지 않은 발해와 고려인들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조선 초기에 명나라로 가던 사신 일행이 요동을 거쳐 가면서 유민들을 아주 많이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조선의 수도인 [[한성]] 출신인데 전쟁통에 요동에 끌려갔다가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며 사신들을 보고 우는 유민에 대한 기록도 있다(명나라측에서 이들을 자국민으로 여겨 함부로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대다수가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를 거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 역대 황제 == ||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1 || [[고영창]](高永昌) || [[1116년]] [[1월 1일]] ~ [[1116년]] [[5월]] || 융기(隆基) 또는 응순(應順) || [[분류:발해]][[분류:12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