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55년/사건사고]][[분류:제1공화국/사건사고]][[분류:대구광역시의 사건사고]][[분류:테러 사건]][[분류:언론 탄압/대한민국]] [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대한민국의 언론통제와 저항)] [목차] == 개요 == 1955년에 일어난 [[대구광역시|대구]] [[매일신문]]에 대한 [[테러]] 사건. == 상세 == 사건의 발단은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관제 데모'''에서 비롯되었다. [[1953년]]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정전 협정의 준수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의 결의에 따라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유엔군사령부와 [[북한]]에서 각각 지정한 국가에서 감독관들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이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정했고 이게 수락되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엔의 결의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를 항의할 명분이 없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에선 [[중립국]]에 공산국가가 웬말이냐며 대대적으로 이를 규탄하는 여론을 알리겠다면서 전국 학교마다 학생들이 동원된 관제 데모를 시킨 것이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도 이런 학생들을 동원한 관제 데모가 연일 일어난 탓에 학생들은 지치고 있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1955년]] [[9월 10일]] [[주유엔대사|주 유엔 한국대사]]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자 당시에도 엄청났던 대구의 살인적 더위 속에 '''학생들을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세워 놓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리되자 대구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대구의 지역신문이었던 대구 매일신문의 주필이자 편집부장 [[최석채]]는 이런 시민들의 불만을 그대로 사설로 옮겨서 [[9월 13일]]자 신문에 '''"학생들을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관제 데모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을 비판했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789&yy=2015|#]] 이러자 대구 지역 [[정치깡패]]들의 [[어용]]단체인 국민회와 [[자유당]] 경북도당에서는 '''관제 데모를 반대하는 건 이적행위이고 용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면서 대구 시내 곳곳에 최석채를 처단하라는 벽보를 붙였다. 그리고 [[9월 14일]]에는 국민회 명의로 대구 매일신문의 사과와 사설의 내용 취소, 사설의 집필자 처단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대구 매일신문이 자신들을 할말을 했을 뿐이라면서 국민회의 요구를 무시하자 [[9월 15일]] 국민회와 자유당 경북도당 등이 동원한 [[정치깡패]] 20여명이 매일신문사에 난입해 [[기자]]들을 폭행하고 인쇄기를 때려부수고 도망쳤다. 이후 이를 알게 된 야당 의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대한민국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진상조사단이 꾸려져 대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신상수 경북경찰청 사찰과장은 국회 진상조사단 앞에서 '''"백주대낮에 일어난 [[테러]]가 무슨 테러요?"'''라는 황당한 [[망언]]을 지껄이는가 하면 자유당은 이 사건을 애국적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정치깡패 처벌과 언론 자유 보장 등을 담은 진상조사단의 보고서 제출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매일신문 주필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 버렸다. 이에 국회 진상조사단이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대구지검 검사장을 소환하였는데 대구지검 검사장 역시 '''"[[헛소리|최석채 이 양반 끄적거린거 보니까 이북 방송이랑 논조가 비슷해서 일단 잡아넣은 것일 뿐이고 설마 경찰이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했겠느냐?]]"'''는 어이없는 진술을 했다. 그나마 사법부는 개념이 있어서[* 이승만 시대 사법부는 [[김병로]]의 영향으로 독립성을 지키면서 자신들의 신념과 법률 하에서의 재판을 진행하는 개념있는 집단이었다.] 최석채는 한 달 만에 풀려나서 불구속 기소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에 대법원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자유당]] 시대의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건이자 온갖 문제가 다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 기타 == * 참고 기사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791&yy=2015|60년 전 그날, 매일신문 '백주의 테러' 사건 재구성(매일신문)]] * 1990년 초 [[월간조선]]에선 자유당 정권이나 이승만 시절과 관계 없는 당시 시대상으로 어쩔 수 없는 망언으로 이걸 은근슬쩍 옹호한 적도 있다. --누가 이승만빠 아니랄까봐(...)-- *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에서도 언론 탄압하고 나 몰라라 입씻는 짓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 이 사건의 당사자 최석채는 사망한 지 9년 뒤인 [[2000년]]에 국제언론인협회(IPI)의 "20세기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50인"에 선정되었고 그해 11월 프레스센터에 동판이 설치되었다. * 2015년 9월 12일에는 이 사건 60주기를 맞아 대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몽향 최석채 매일신문 주필 [[필화]] 사건(백주의 테러 사건) 60주년 실경 연극'이 펼쳐졌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874&yy=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