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중국국민당]]의 우파, 그 중에서도 [[후한민]], [[쑨커]]의 우익 당권파와 [[린썬]]의 서산회의파의 사상으로 [[다이지타오]]가 정립한 정치이론이다. 국민당 우파가 국민당 좌파에 비하여 혁명적 특색이 약화되었다고 평가되던 와중 다이지타오주의로 이론적 정립이 완성된다.[* 오히려 국민당 좌파는 분공 결정 이후 세력을 잃고 [[왕징웨이]] 개인에 의존하다 [[한간|돌이킬 수 없는 강]]을 [[왕징웨이 정권|건너고 만다.]]] == 삼민주의의 해석 == === 민족주의 === >[[중화민족]]이 생존하려면 먼저 국민당이 생존해야 한다. 국민당이 생존하려면 반드시 그 생존욕망이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하는 독립성, 배타성, 통일성, 지배성이 충분히 발휘되어야 한다. 공통의 믿음이 세워지지 않으면 상호 믿음이 생겨나지 않고, 상호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단결은 굳건하지 않으며 생존할 수 없다. [[중화민국]]을 사랑하는 국민당원이여, [[삼민주의]] 신도들이여, 단결하라! 다이지타오는 중국민족의 생존에는 국민당이 필수적이고 국민당만이 [[국민혁명]]을 완수하고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는 기존의 방침을 공고히 했다. 그리고 중화민족의 범주는 [[청나라]] 영토내의 모든 민족으로 이들을 [[한족]]의 문화로 동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각 민족의 근원을 말살하는 역사공정과 문화탄압을 사용하였다. 이어 [[1925년]] 6월 <[[쑨원|손문]]주의 철학이론>을 발표하여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보존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은 같은 민족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분리하여 중국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론]]에서 근거로 사용한 [[변증법적 유물론]] 역시 중화민족 전통의 관념론인 [[유교]]와 맞지 않아 옳다고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 민권주의 === [[쑨커]]의 [[민주집중제]]를 받아들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는 [[중국]]의 현재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유보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후스]]를 비롯한 소수 [[리버럴]]을 제외하고는 국민당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다이지타오가 보기에 만약 [[신해혁명]]처럼 군사력을 지니지 못한 채로 여러 정파가 분리된 채 투쟁한다면 혁명 역량이 분산되어 혁명의 수행이 불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정부는 [[쑨원]]의 이론에 따라 정(政)과 치(治)가 분리된 [[오권분립]]을 추구했다. 여기까지 보면 알 수 있듯이 민권주의 부문에서 기존 국민당과의 차이는 없다. === 민생주의 === <민생철학 계통표>를 발표하여 무산계급혁명이론을 비판하며 [[칼 마르크스]]의 철학을 민생주의와 구별지어야한다고 보았다. 민생주의는 어디까지나 [[토지 공개념]]을 기본으로 하여 농민 중심인 중국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겠다라는 의미이지 대부르주아 계급투쟁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당은 유교적 상부상조를 통한 공공의 토지 소유를 이륙해야한다고 여겼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대지주, 매판자본가, 봉건적 [[군벌/중화민국|군벌]], 서구 [[자본주의]]는 완전히 소멸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접점으로 햇갈린 부분이자 국민당 좌파의 치명적 오류라고 지적한다. 또한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국제주의 노선]]과 지시를 따르는 것은 국민당의 배타성과 고유성을 약화시키는 배당행위라 여겼다. == 반공 방법론 == 다이지타오는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는 기형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당을 국민당 내부에서 숙청하고 분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공합작|공산당이 국민당과 동맹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같은 당으로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업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면 좋지만 만약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선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여도 좋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를 동조하였다. 즉 과정보다는 방향성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 후한민의 학설 == [[후한민]]은 여기에 더해 추가적인 방침을 더했다. 후한민은 [[서산회의파]]에 대해 중립적인 다이지타오의 모습에 반대하며 적극적으로 당이 통일되어야한다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의 모든 권력은 당연히 국민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사력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장제스]]를 비판하였다. 다이지타오가 [[반공]]을 제외하고 다른 계파에 대해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인 반면 후한민은 정치가로 반[[서산회의]], 반[[개조파]]와 반장을 모두를 적극적으로 외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장제스의 학설]]이 강력한 지도자를 통한 가부장적 질서를 추구했다면 후한민의 학설은 장제스보다 더 반사회주의적이고 장제스의 최고존엄 위치를 당정일치로 대체한 사상이었다.[* 후한민은 [[광저우 상단 사건]]에서도 무력 진압 대신 협상을 주장할 정도로 랴오중카이의 국민당 좌파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준동을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이런 장제스와 후한민의 갈등은 [[탕산 사건]]이라는 사건으로 표출된다. == 같이 보기 == * [[중국국민당]] * [[반공주의]] * [[유교 사회주의]] * [[협동조합주의]] * [[레닌주의]] -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지타오주의는 장제스의 학설보다도 전위당 이론에 충실했다. 국민당 좌파도 [[푸젠사변]] 이후 정통 좌파([[쑹칭링]], [[덩옌다]] 등)는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중국농공민주당]]를 설립하며 제3당 운동을 펼친다. * [[장제스의 학설]] - 주요 이념적 경쟁자. * [[서산회의파]] - 다이지타오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임과 동시에 기존 국민당 중앙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은 이단아였다. 후한민과 다이지타오 모두 서산회의파를 백안시하였다. [[분류:중국의 사상]][[분류:중국국민당]][[분류:반공주의]][[분류:중국 내셔널리즘]][[분류:인명으로 된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