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용강군 출신 인물]][[분류:광주 노씨]][[분류:1922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파일:노영준.jpg|width=300px]] || || 성명 ||<(> 노영준(盧永濬) || || 본관 ||[[노(성씨)|광주 노씨]] || || 생몰 ||<(> [[1922년]] [[10월 13일]] ~ [[1998년]] [[10월 24일]] || || [[출생지]] ||<(> [[평안남도]] [[용강군]] 봉산면 의산리[br](현 평안남도 용강군 옥도리)[* [[노(성씨)|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 생애 == 노영준은 1922년 10월 13일 평안남도 용강군 봉산면 의산리(현 옥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1월 일본군 평양사단 내 47포병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그는 여러 한인 학병들과 함께 집단 항쟁을 계획하고 42부대의 김완룡(金完龍)·[[박성화(독립운동가)|박성화]] 등과 함께 의거를 모의했으며, 1944년 8월부터 동지를 포섭하는 등 본격적인 항쟁 준비를 추진했다. 그들은 평양 사단 병영을 폭파하는 것을 논의했지만,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부대 탈출 후 한국-만주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적절한 시기에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했다. 그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지만 날짜가 임박하면서 각 부대 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자 부득이 거사일을 한 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했다. 그는 의거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한인 군사경찰 보조원 임영호에게 학병 계획을 설명했다. 그런데 임영호는 이 사실을 본부에 알렸고, 설상가상으로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모든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군사경찰대에 체포된 노영준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군법회의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이후 서울에서 평범하게 지내다 1998년 10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노영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