路粹 (? ~ 215) [목차] == 개요 == [[후한]] 말의 인물이자 [[조조]]의 부하로 자는 문위(文蔚). 연주 진류군 사람. == 생애 == 어려서 [[채옹]]에게 학문을 배웠고 초평 연간[* 190 ~ 193년이다.]에 거가를 따라서 삼보[* 경조윤(京兆尹), 우부풍(右扶風), 좌빙익(左馮翊) 일대를 말한다.]에 이르렀으며, 196년에 높은 재주로 엄상과 함께 상서랑이 되었다. 이후 승상군모좨주로 있었는데, [[진림]], [[완우]]와 함께 기실의 업무를 전달했다. 이 때 [[공융]]은 조조를 비판하면서 풍자해 비웃었기 때문에 조조의 미움을 샀는데,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를 공융보다 높은 관직에 임명했고 치려가 조조에게 영합하기 위해 관직을 이용해 공융의 죄를 날조해 고발했다. 이 때 노수는 조조의 명을 받들어 공융의 죄상을 상주했는데, 그 내용에는 "공융이 자기는 대성인의 후예인데,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묘금도[* 여기서 묘금도(卯金刀)는 한 황실의 유(劉)씨를 나눈 글자다.]란 말인가?"라고 날조한다. 공융이 죽은 후에 사람들이 노수의 글을 보고 그 재주를 가상히 여기면서 두려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융은 노수를 높이 평가했었는데 후한서 [[예형]] 열전에 공융이 헌제에게 예형을 추천하는 글에서 '근자에 노수(路粹)가 엄격한 형상과 특출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대랑(臺郞)으로 등용하셨으니, 예형도 그에 못지않은 인재가 될 것입니다.' 라며 노수가 언급되었다. 215년에 비서령을 옮겨 대군을 따라 한중에 이르렀다가 나귀를 요구해 싼 값에 당나귀를 사서 금령을 어긴 것으로 인해 처형되었다. [[조비]]는 원래부터 그와 친했지만 그의 죽음에 탄식하면서 애석했는데, 위나라가 세워지자 노수의 아들이 장사로 임명되었다. [[한단순]], [[번흠]], [[정의(삼국지)|정의]], [[양수(삼국지)|양수]], [[순위(조위)|순위]] 등과 함께 문체가 있었지만 [[건안칠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 창작물에서 == 소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글을 잘 쓰는 것으로 인해 발탁되었고 한중 정벌이 끝나고 비단 한 필로 백성의 당나귀를 빼앗은 일을 문제삼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조조가 노수를 처형한 이유는 조비, [[조식(삼국지)|조식]]의 후계자 다툼에서 나온 기밀을 노수가 그의 아들에게 알렸으며, 결국 노수의 아들이 조비, 조식의 관저를 드나들면서 그 기밀을 유출되었다.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관료]][[분류:21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