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learfix] == 개요 == [[한강]]에 있던 [[나루터]]. 위치는 지금의 '''[[노량진동]]이 아닌''' 노들섬 맞은편의 동작구 본동 258-159번지 일대. == 역사 == === 유래 === [[노량진]]의 원래 고유어(우리말) 표현이다. 한자로 옮기며 [[해오라기]] 노(鷺), 들보/해협 량(梁), 나루터 진(津). 한자에 뜻을 담았듯 백로([[해오라기]])가 노닐어서 "노(들)", 노들섬과 동작구 사이의 좁은 해협이라 "량"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는 나루터 주변에 갈대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노을빛으로 물들어 "노들"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연경관이 대대로 빼어났던 곳임을 나타낸다. [[노량 해전]]의 노량과는 무관하다. 이쪽은 이슬 노(露), 들보/해협 량(梁)의 한자를 쓰며,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둘 사이의 좁은 해협(량)을 의미한다. 이름처럼 이 곳은 이슬과 안개가 자욱하곤 하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새벽녘에 엄폐하여 일본 함대를 유인하는 전략이 가능했다. === [[조선시대]] === [[한강]] 남북을 잇는 여러 나루터 가운데 하나였다.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한강에 다리가 없었기에, [[나룻배]]로만 건널 수 있었다. 제물포 또는 한강 상류에서 온 배들이 노들나루에서 쉬어간 뒤, 노들섬을 거쳐 용산으로 건너 서울으로 가곤 했으므로, 여객/화물(조운)의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에 와선 한강/한양/한성 이남의 모든 조운은 모두 여기에서 취합한 후 한강을 건너게 했다. 당시 이 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가 관할했으며, 도승(渡丞, 정9품)이 관리했다. 나중에 [[영조]]가 이 관리자의 직책명을 도진별장(渡津別將)으로 고쳤다. [[구한말]]에 [[일본 제국]]이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대교]]를 지었음에도, 한국인들은 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노들나루의 나룻배를 통해 한강을 건너곤 했다.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노들나루의 이용을 금지했다. 조선시대부터 노량진 또는 노량도라는 지명을 써왔으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정리하며 노량진을 공식지명으로 확정했다. === [[대한민국]] === 1945년, [[중앙대학교]]가 [[교가]]에 "한강수 굽이치는 노들의 강변 명수대 송림속에 우뚝선 중앙"이란 소절을 넣는다. 인근의 초·중·고에도 '노들'이라는 이름을 쓴다. 1967년, [[노들로]]라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겼다. 1991년, [[3기 지하철 계획]]을 하며 [[서울 지하철 9호선]]에 [[노들역]]이 결정되었다. 2009년, 동작구민들에게 노량진뉴타운에 조성될, 노들역 2번 출구의 공원의 이름을 공모했는데, "노들나루 공원"이 선정되었다. [[https://cm.asiae.co.kr/article/2009030908432441042|#]] 노들역 4번 출구에서 13분 가량 등산하여 올라가는 수도산/고구동산/용봉정공원에 오르면 [[마천루/대한민국|대한민국의 35개 마천루]] 중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모든 마천루를 둘러볼 수 있다.''' == 관련 문서 == * [[대한민국/지명]] [각주] [[분류:서울특별시의 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