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노능서}}}'''[br]'''魯能瑞'''}}}}}}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노능서.jpg|width=100%]]}}} || || '''이명''' ||서준철(徐俊哲) || ||<|2> '''출생''' ||[[1923년]] [[9월 1일]] || ||[[평안남도]] [[용강군]] 대대면 덕동리[br](현 [[평안남도]] [[남포시]] [[와우도구역]] 대대동) || ||<|2> '''사망''' ||[[2014년]] [[4월 9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 || '''학력''' ||[[주오대학]] {{{-2 ([[법학]] / 중퇴)}}}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23년 9월 1일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 도중 학병에 끌려갔다. 학병에 끌려간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장례도 치루지 못한 채 입대했다.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에 복무 중 탈출하였고, 장준하, 김준엽, [[김국주]], [[전이호]], [[차약도]] 등과 함께 1944년 한광반 1기를 졸업하였다. 당시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입대한 이야기는 '학병의 전형적 비극'으로 알려졌으며, 한광반 졸업 연극 공연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복군 장준하.jpg|width=100%]]}}} || || 1945년 8월 20일, [[OSS]] 유격훈련을 수료한 뒤 촬영한 사진.[* 좌측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 1945년 OSS 훈련을 마치고 [[이정선(1921)|이정선]]과 전라도반에 배속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지만 [[8.15 광복]]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8월 18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장준하]], [[김준엽]]과 함께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해방 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과 함께 귀국하였고, [[6.25 전쟁]] 당시 육군 대위로 영도유격대 기간요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훈련을 받고 유격대원들을 훈련했다. 전후 [[김우전]], [[장재민]] 등과 함께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였다. 1969년 경 로스엔젤레스 지점장, 1971년 경 동경 지점장을 역임하였고, 1973년, 77년에는 이사로 선임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 생활하다 2014년 4월 9일 별세하였다. == 참고자료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8657|공훈전자사료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643|내의 잘라 표지를 만든 '등불' 창간]], [[미디어오늘]], 2012년 9월 3일 자. [[분류:한국광복군/군인]]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1923년 출생]] [[분류:2014년 사망]] [[분류:용강군 출신 인물]][[분류: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