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0> {{{#ffffff '''네크미르 전투'''}}} |||| ||||||<#2e8b57> {{{#ffffff '''날짜'''}}} |||| |||||| 1419년 12월 |||| ||||||<#2e8b57> {{{#ffffff '''장소'''}}} |||| |||||| [[보헤미아]]([[체코]]) 플젠 북서부 네크미르 요새 |||| ||<#2e8b57><:> {{{#ffffff '''교전세력'''}}} ||<#f39999> [[후스파]] ||<#83aaf0> [[보헤미아]] 왕당파 || ||<#2e8b57><:> {{{#ffffff '''지휘관'''}}} ||[[얀 지슈카]] ||슈밤베르크의 보후슬라프 || ||<#2e8b57><:> {{{#ffffff '''병력'''}}} ||300 명 [br] [[전투 마차#s-1.2]] 7 대 ||2000 명 || ||<#2e8b57><:> {{{#ffffff '''피해 규모'''}}}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 ||||||<#2e8b57><:> {{{#ffffff '''결과'''}}} |||| |||||| 후스파의 승리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스파(派) 중에서도 [[얀 지슈카]]가 지휘하는 과격파 농민병들이 그들을 토벌하러 온 귀족 기사와 기마병들을 격파하며 [[후스 전쟁]]의 서막을 알린 전투. == 배경 == 141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주관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처형당하자 이미 후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많은 [[체코인|보헤미아인]]이 분노했다. 1419년에 이복형 [[바츨라프 4세]]가 죽자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도 겸하게 되었으나 보헤미아인들은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당시 후스 파는 온건파인 우트라크파(Utraquist, 양형영성체주의자)와 과격파(대표적으로 타보르파)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는데 농민들 위주로 구성된 과격파는 [[높으신 분들]]에 의한 중재안을 거부하고 [[프라하]]를 떠나 서부 [[플젠]] 근교의 네크미르 요새로 집결하였다. 이들의 불온한 움직임에 귀족 판관인 보후슬라프가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러 접근했다. == 전투 == 첫 전투이고 소규모인 탓인지 기록은 빈약하다. 불과 [[300]]명 뿐인 후스파 군대는 약 7대 가량으로 추산되는 [[전투 마차#s-1.2]]에 의존하여 주로 기병 전력으로 이루어진 왕당파 군대의 돌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결국 왕당파군은 포기하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전 병력을 둘러싸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수의 전투 마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새로운 전술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 결과 == 어느 쪽도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였고, 전쟁은 장기화하게 된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으로 인정받고 통치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20년 3월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곧이어 [[수도몌르 전투]]와 [[프라하]] [[비트코프 전투]]가 벌어진다. 여담으로 진압하러 왔던 보후슬라프는 [[얀 지슈카]]에게 몇 번 [[수정펀치|패배]]를 당한 뒤 훗날 전향해서 같은 편으로 싸우게 되었다 [[카더라]]. [[분류:지상전]][[분류:후스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