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480호}}}]]''' || ||<-2> {{{#fff {{{+1 '''남한산성 행궁'''}}}[br]{{{-1 南漢山城 行宮}}}}}} || ||<-2> {{{#!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남한산성 행궁, 너비=100%, 높이=100%)]}}} ||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84-29[br](남한산성행궁) 외 일원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면적}}}''' || 87,548㎡ || || '''{{{#fff 지정연도}}}''' || 2007년 6월 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 ||<-2> [[https://www.gg.go.kr/namhansansung-2| {{{#fff 공식 홈페이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10.postimg.org/img_5797.jpg|width=100%]]}}} || || {{{#gold '''남한산성 행궁 전경'''}}}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Al6m0awnQs)]}}} || || {{{#gold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영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성]] 주변에 있는 [[조선]]의 [[행궁|행궁(行宮)]]. '광주행궁(廣州行宮)'으로도 불렸다.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80호로 지정받았다. 1624년([[인조]] 2년)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어명|명]]으로 착공하여 2년 후인 1626년(인조 4년)에 완공했다. 이후 멀쩡히 잘 전해지던 걸 일제가 행궁과 관아에 [[방화]]하여 불에 타 소실되어서 행궁지로 남아있다가 [[문화재청]]에서 2011년 행궁구역의 '''대부분을''' [[복원]]했다.[* 다만, 행궁 좌측의 내아와 향실은 현재까지 복원 하지 못했다.] == 역사 == === 창건 === 남한산성 행궁이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받던 시기는 [[병자호란]] 때였다.[* 《[[남한산성(소설)|]]》과 〈[[남한산성(영화)]]〉의 주무대가 바로 이 남한산성 행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자호란 때 원래 [[강화도]]로 피난을 시도하려던 [[인조]]가 강화도 피난이 좌절되면서 결국 [[남한산성]]으로 옮겨 1636년 12월 14일부터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조선왕조실록 기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1637년 1월 30일까지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사용했던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30_002|《인조실록》 기사,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으로 나아갔다."]] === 활용 === [[병자호란]] 이후에는 지리적으로 [[세종대왕]]의 [[영릉(세종)|영릉(英陵)]]과 17대 [[효종(조선)|효종]]의 [[영릉(효종)|영릉(寧陵)]]이 있는 [[여주시]]와 근접하여서 19대 [[숙종(조선)|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조선)|정조]] 등이 영녕릉 참배를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 {{{+1 '''[[남한산성]] 행궁에 있다가 감회가 일다'''}}} >천연의 금탄성지가 왕기를 진무하고 >봉황 날고 용이 서려 대궐을 옹위하네 >군영에 달이 밝아 딱따기 소리 들려오고 >행궁에 바람 빨라 피리 소리 드무네 >험천[* 병자호란 중이었던 1636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전투를 뜻한다.]에 비가 내려 마음이 아프고 >쌍령[* 병자호란 중 조선군이 패배한 전투가 있었던 곳.]에 구름 짙어 슬픔이 더해지네 >조정 계책 좋지 않아 진실로 한스러우니 >충신과 의사가 옷자락에 눈물 적셨네 >---- >[[열성어제]][* 김남기 번역본] 숙종은 이곳에 머물며 병자호란에 관한 시를 썼다. === 소실 ===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철훼하여 행궁 터만 남아있다가 [[문화재청]]에서 2011년에 행궁 전체를 복원했으며 2012년에 일반에 개방했다. 행궁은 상궐(上闕)과 하궐(下闕)로 나뉘어졌으며 외행전과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좌전 등이 있으며 [[정원|후원]]에는 이위정(以威亭)이라는 [[정자(건축물)|정자]]가 있고 그 외에 [[경기도]] [[광주시|광주]] 유수의 집무사(集務舍) 등이 있다. === 여담 === 여담으로 이 행궁이 지어지면서 성남에 있던 [[낙생행궁]]은 퇴락하여 쓰이지 않다가 [[인조]]때에 [[홍수]]로 유실됐다.--비운의 행궁-- == 배치 및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88b067faf3f97c8bfe18fff0f0fde323de52a775f4e6edec2d05b1f95a673c07.jpg|width=100%]]}}} || || {{{#gold '''행궁 구조도'''}}} ||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20개소 정도의 [[행궁]]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이 광주행궁만이 유일하게 [[종묘#s-2.7]]와 [[사직#s-2]]을 두었다.(좌묘우사)[* [[궁궐]]이 있는 [[수도(행정구역)|도성]]을 배치할 때에는 주례 고공기에 기록된 도성배치 기준에 따라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서쪽)에는 [[사직단]]을 두었으며 이러한 원리를 '좌묘우사'라고 한다.] 비상시에 예비 [[수도(행정구역)|수도]]로서의 기능을 했기에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어 놓았다. 원래 건물은 상궐 72.5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6.5 칸의 규모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헐어버려 터만 남아 2002년부터 내행전을 비롯하여 일부 부속건물들을 복원하기 시작 2012년 5월 252.5칸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복원물이 더 커졌는데?-- 부속건물로는 재덕당[* 현재 복원된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추정된다.], 내행전[* 현재 복원된 건물로, 왕의 생활공간이었다.], 남행각[* 현재 복원된 건물로, 요즘의 경호원 비슷한 곳이다.], 북행각[* 현재 복원된 건물로, 요즘의 비서실 비슷한 곳이다.], 좌전[* 현재 복원된 건물로,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좌승당[* 현재 복원된 건물로, 광주부에서 제일 높은 책임자가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외행전[* 현재 복원된 건물로, 왕과 신하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일장각[* 현재 복원된 건물로,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한남루[* 현재 복원된 건물로, 남한행궁의 외삼문루이다.] 등이 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남한산성, version=212, paragraph=3.2)] [[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행궁]][[분류:방화로 소실된 문화재]][[분류:광주시의 문화재]][[분류:광주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