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9년/사건사고]][[분류:대한제국의 사건사고]][[분류:메이지 시대/사건 사고]][[분류:일본의 학살]][[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분류:조선 의병]][[분류:한국의 독립운동/전투]] [include(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 [include(틀:대한제국의 대외 전쟁 · 분쟁)] ||||[[파일:일제에 의해 체포된 호남의병.jpg|width=300]]|||| || 일제에 의해 체포된 호남 의병들 || [목차] == 개요 == '''남한 대토벌 작전'''([[일본어]]: [ruby(南韓大討伐作戦, ruby=)])은 [[일본 제국]]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호남]]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실시한 군사 작전이다. 여기에서 '[[남한]]'은 [[대한제국]]의 남부, 구체적으로는 [[전라남도]]를 가리킨다. [[일본 육군]]의 정예 2개 [[보병]] [[연대(군대)|연대]],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이 [[일본 해군]]의 보조를 받아 투입되어 진행된 이 작전은 [[의병]]과 같은 [[게릴라]] 저항 세력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해당 지역 민간인들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초토화 작전을 동시 수반하였고, 결국 작전이 종결될 시점에 이르면 호남 지역의 의병들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후로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이러한 결과는 일본 정부 측의 선전과 맞물려 서구권에서 한국인(당시에는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인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 순응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물론 3.1 운동이나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대규모 반일 시위, 1915년까지 진행되었던 [[채응언]] 의병 부대의 투쟁, [[의열단]]의 국내 의거와 의병의 후예인 독립군들이 진행한 192~30년대 해외 무장투쟁 사례들과 같이 이런 인식에 대해 카운터 칠 근거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진 서구인들을 만날시에는 대처가 쉬운 편이다.], 주로 [[중국]]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한국)|독립군]]이 활동하는 것으로 그 맥을 잇게 된다.[* 물론 [[의열단]]과 같은 단체가 있기는 했지만 [[교전권]]을 갖춘 정식 군대라고 보기에는 애로 사항이 많다. 1930년대 [[보천보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만주와 소련을 거점으로 잠깐 국내에 잠입했다가 튄 수준에 그친데다가 결정적으로 윗동네에서 김씨 일가를 우상화하는데 써먹느라 온갖 어처구니 없는 과장이 덧붙여졌기에..] == 배경 == 1907년 [[정미 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는 강제 해산당하고, 해산된 정규군은 [[남대문 전투]]와 각 지방 진위대의 봉기 이후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움직임을 보이던 의병에 가담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통제와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지방의 [[진위대]]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했다.] 이 시기 일어난 의병들을 [[정미의병]]이라고 부르는데, 각종 신식 무기를 손에 든 정규군[* 물론 그래봤자 [[일본군]]의 장비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기는 했다.]이 가담함에 따라 의병들의 전력은 대폭 증강된다. 각개 활동하던 전국의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조직을 만들어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기까지 한다. 애초에 전력이 명백한 열세였던데다가, 총사령관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면서 전투 직전에 진영에서 이탈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 유교적 사고 방식으로 당연히 정당화되고 모두들 납득할 수있었다면 당시 이인영의 낙향을 되돌리려 설득을 시도한 같은 유림들이 왜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예시에서 보듯 유교 역시 전쟁 등 피치 못한 긴급한 상황인 경우 집안 제사 등은 잠시 유보하는 걸 허락했다. 때문에 정통 유학자의 관점에서도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빠져야 할 이유가 없었고 부친상은 얼마든지 연기하는 게 당시 유교적 시각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 그래서 이를 두고 이인영이 혼자 도망쳤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떠나기 전부터 그냥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이인영은 나름 자신의 할일을 다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실제로도 허위나 민긍호의 합류로 이인영이 없어도 체제가 굴러갈 수 있었기에 실제로는 어처구니 없이 작전이 터진게 아니라 이건 아니라고 보고 서울진공작전을 취소하는 대신 기존의 유격전 작전체계로 다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까지 터지면서 이 작전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고, 각 지역의 [[의병]]들의 근거지를 진압하게 된다. 1907년대의 정미의병은 원주, 여주, 진주, 양주, 강화 등 진위대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나 지속되는 일제의 토벌로 의병활동의 근거지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가 차례로 진압되면서 점차 전라도로 옮겨가게 된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 교전 횟수는 전국 전체에서 25%를 차지하였고, 의병의 수도 마찬가지로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더더욱 심화되어 1909년 6월까지 전투 횟수의 47.3%, 전투 의병 수의 50.1%가 호남에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의병들의 마지막 근거지인 전라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작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 일제의 추산에 의하면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 호남 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000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이곳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본거지[* 그도 그럴게 전라도는 곡창지대다. 당연히 농민운동의 본거지가 될 수 밖에..]로서 반일 의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반일 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호남 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남한대토벌작전 [南韓大討伐作戰]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 연구원) == 작전 개요 == * 기한 :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로 계획되었으나, 작전 개시 초기 단계에서 별다른 성과없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10월 30일까지 연장되었다. * 투입 전력 : 육군 보병 연대 2개 및 관할 지역의 육군 [[헌병]] 보조원과 [[일본제국 경찰|경찰]] 투입. [[다도해]]인 호남 지방의 지리적 요건을 고려, [[섬|도서]] 지역으로의 의병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해군]]의 [[수뢰정]] 4척을 동원했다. * 작전 구역 : [[전라도]]의 내륙과 연안 도서. 전라도를 삼분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3단계에 걸쳐 나누어 진격하면서 의병을 퇴로를 차단하기로 계획. 또한 전라도를 좌우로도 양분하여 서부 지구는 보병 제1연대가 맡고, 남부 지구는 제2연대가 맡기로 하였다. == 진행 == 작전은 총 3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단계 작전은 변산반도 - [[남원]] - [[하동군]]으로 이어지는 봉쇄선을 설치하는 것이 골자였다. 제2단계에서 육군 2개 연대는 [[광주광역시|광주]], [[영광군|영광]] 등으로 남하하면서 의병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서부를 맡은 제1연대는 [[영산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동부를 맡은 제2연대는 [[섬진강]]에서 [[소백산맥]]을 통과해 [[영산강]]으로 진격했다. 제3단계에서는 해상 루트를 이용해 섬으로 숨으려는 의병을 추적하기 위해 [[해군]] 수뢰정 4척을 이용하는 도서 지방 초토화 작전이었다. 당시 의병은 활동 지역 근처의 민간인들의 후원을 필수적으로 하는 게릴라 세력이었으므로, 호남 일대 민간인들에 대한 탄압도 이 과정에서 뒤따랐다. 특히 일본군은 의병을 후원해주는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포위하고, 호적 또는 명부나 민적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이 나타나면 추궁하였으며, 의병을 숨겨주고 식량을 제공했다는 증거가 잡히면 해당 마을을 잔혹하게 초토화시켰다. 이 때문에 호남의 민간인들은 일본군에게 보복당할까봐 의병을 숨겨주거나 지원해주는것을 기피하였고 의병들은 이전처럼 민간인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한 번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하면서 [[일본군]]의 단속을 피해 숨었다가 안심하고 다시 나타난 의병을 사살하고 체포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었다.[* 의병과 관련이 깊은 곳은 수십번까지도 수색을 했다.] 이러한 일제의 군사적 압박에 의병들은 전면전을 회피하고 은신처를 자주 옮기거나, 부대를 나눠 각개적으로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으려고 시도하면서 전력 보존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 군경이 친일 밀정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예상 이동로에 매복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때려잡는 바람에 큰 소득은 없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기존의 행정 구역마저 파괴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전라남도]] [[낙안군]]에 있던 [[벌교]]라는 마을에서 의병장 [[안규홍]]이 맨손으로 일본 육군 헌병을 때려죽였다는 이유로 낙안군을 폐군해 버렸다. 게다가 낙안 지역을 2개로 나누어 보성, 순천에 각각 편입하여 행정 구역이 갈려버렸다. 그리고 옛 낙안군 지역은 옆도시 순천이 산업이 탄탄한 중견도시로 성장하는 동안 완전히 소외되었다.[* 21세기 현대에 낙안 지역의 유명 관광지가 된 [[낙안읍성]]은 전국이 경제발전하던 시대에 발전 동력이 전혀 없다보니 오히려 보존이 잘 되어 관광지가 된 케이스다. 일제의 만행이 전화위복이 된 극단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 결과 == 일단 일본이 공식적으로 작성한 1909년 10월 27일자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4&prevPage=0&prevLimit=&itemId=jh&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jh_099r_0100_0030&position=1|통감부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사망자는 불과 '''육군 [[병사]] 8명'''이 전부로, 계급별로 [[상등병]] 1명(병사), [[일등병|일등졸]] 5명(전사 2명, 경비정 전복으로 익사 1명, 도하 중 익사 1명, 추락사 1명), [[이등병|이등졸]] 2명(전원 경비정 전복으로 익사)이다. 붙잡은 의병이 1,100여명, 항복한 수는 7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의병장만도 103명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314|남한 대토벌]]] 특히 뼈 아팠던 것은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 지방 사족 출신이 다수였던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한 남한대토벌작전 전체 기간 중 양측의 피해규모를 살펴보면, 토벌대측은 사망자가 136명, 부상자 277명이었던 반면, 의병측은 사망자가 17,779명,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이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폭도'로 규정당하고 일본군에 의해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 벌교, 순천, 광양 등을 거쳐 하동까지 도로(현재의 국도 2호선)를 개설하는 강제 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이 작전 이후에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에서는 아직 의병이 남아있었으나 일본의 토벌로 인해 그 기세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한국이 일본에 병합당한 이후 국내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항일 전투 세력은 국경을 넘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그 명맥을 잇게 된다. 덧붙여 이 학살로 인해 국내에서 대규모 항일 무력 세력이 와해되고 국내에서는 황해도 산간과 경북 일월산, 그리고 서남해 섬 지역 등지에 소규모 조직만이 남게 된다. 이후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는 국외인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가게 된다.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악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며 재산 피해까지 발생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감정이 매우 나쁘다. 게다가 일본은 이러한 악행을 전혀 사과하지도 않고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일본 제국의 대외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