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문관]][[분류:1400년 출생]][[분류:1440년 사망]] [목차] == 개요 == 南簡 (1400년 ~ 1440년) 남간은 [[조선]] 시대 [[세종(조선)|세종]]조의 문신이다. 할아버지는 개국 1등공신 영의정부사 [[남재]]이며 종조[* 작은할아버지]는 [[남은]], 외할아버지는 참의 [[방순]], 아버지는 남경문,[* 병조의랑 역임, 영의정부사 추증, 요절] 큰 형은 좌의정 [[남지]], 동생은 [[태종(조선)|태종]]의 [[부마]]인 의산군 남휘이다. 세종조에 등과하여 주로 대간의 업무를 맡았으며 예문직제학 및 지사간원사에 이르렀으나신병으로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얼마후 졸(卒)하였다. 이후 대사헌이 추증되었다. == 생애 == 1419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형조좌랑[* 정6품]이 되고 1424년에는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427년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좌정언[* 사간원의 정6품관직]이 되었다. 1430년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어 공법(貢法) 제정에 관여, 전품(田品)을 9등으로 구분하여 징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1432년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바로 좌헌납[* 사간원의 정5품관직]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1433년에는 이조정랑[* 청요직], 1435년에는 사인[* 의정부 정4품 관직], 1436년 사헌부 장령[* 사헌부의 정4품 관직, 장령을 포함한 대간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직무가 막중하였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문과에 급제한 자로서 직배(直拜)하거나 승문원·성균관·홍문관 등을 거친 자들이 임명되었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령(掌令))]을 지내고 1439년 예문관직제학[* 조선초기 정3품(당하) 관직으로 주로 승정원의 지신사(후의 도승지)가 겸임하였다.]에 올랐다. 1440년(세종 22년) 4월 지사간원사[* 조선 초기 사간원의 종3품 관직. 사간원의 차석. [[세조(조선)|세조]]조에 사간으로 개칭.]에 제수되었으며 동년 5월에 병이 심해 세종에 상언하여 사직하였고 얼마 후 졸(卒)하였다.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남간(南簡)이 상언(上言)하기를, > >"신이 한열(寒熱)의 병을 앓아 수십 일 휴가 중에 있는데 신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제수하였으나, 침면(沈綿)하여 낫지 않고 병 뿌리가 날마다 깊어져서 회복할 기한이 없어 직사를 비우고 폐하니, 신의 직책을 면하여 주소서."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나는 병이 이렇게 심한 줄은 알지 못하였다." > >하고, 이조(吏曹)에 내리었다. 간(簡)이 사람된 것이 청렴 정직하고 단아 성실하여 바른 것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으니, 제배들이 그 절행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 >"간은 언제든지 풍헌(風憲)에 있어야 한다." > 하였다. > > 세종실록, 세종 22년 (1440년) 5월 20일 신유 1번째기사 == 평판 == 청렴하고 품행이 단정하기로 이름이 높아 실록에서 '''"남간이 사람됨이 청렴정직하고 단아하고 성실하며 바른것을 지키고 아첨하지 아니하니 모든 사람이 그 절행에 탄복하였다. 남간은 언제든지 풍헌[* 풍기(風氣)를 바로잡고, 관리의 정사청탁(正邪淸濁)을 감찰 규탄하는 직임(職任)]에 있어야 한다."'''라 평했다. == 여담 ==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자주 등장하며[* 25건] 풍헌에 있어야 한다는 실록의 평처럼 대부분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대간[* [[조선시대]]에 [[사헌부]]의 대관과 사간원의 간관을 아울러 이르던 말.]의 직을 역임했다. 그의 형 [[남지]]도 사헌부 감찰부터 대사헌까지 모든 직을 역임하고 대언(승지)의 직을 두루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두 형제 모두 세종의 간관으로서 활동하며 총애를 받았다. 형과 더불어 남간도 청요직[* 이조정랑, 대간]을 거치며 예문직제학, 지사간원사[* 훗날의 사간]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형인 남지도 10년 후에 풍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난다.] 형 남지가 세종, 문종조에 삼공(정승)의 자리에 올라 선배였던 [[김종서(조선)|김종서]]의 시기를 받기도 했는데, 오히려 아우였던 남간은 도대평의 일로 사직상소를 올려 세종의 처분을 기다릴 때 좌대언으로 있던 김종서가 상언하여 변호를 해 준 인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