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관련 인물(NPB)]] * [[검은 안개 사건]] * [[영구제명]] [[파일:external/ironna.jp/a48f19cf05b8ad4f1a7bfc3736522f7e.jpg|width=450]] 우측 인물이 나가야스. || 이름 || 나가야스 마사유키(永易 将之) || || 생몰 || [[1942년]] [[1월 1일]] ~ [[2003년]] [[4월]][* 사망일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 국적 || [[일본]] || || 출신지 || [[오사카부]] 모리구치시 || || 학력 || 오사카 공업대학 고등학교 졸업[* 2008년 죠쇼학원 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소속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도에이 플라이어즈]](1962~1967) [br] [[니시테츠 라이온즈]](1968~1969) || [목차] == 개요 ==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검은 안개 사건]]'의 발단이 된 장본인으로 승부조작을 저지르며 [[퍼시픽리그]]의 명예와 인기를 나락에 빠트리고[* 사건 이전에도 [[센트럴리그]]에 비해 인기가 밀리던 [[퍼시픽리그]]는 이 사건으로 속절없이 추락하게 된다. 그 이후 검은 안개 이전의 인기를 회복하기 까진 30여년 가량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소속 팀이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니시테츠 라이온즈]]도 암흑기로 내몰렸다. == 선수 경력 == [[오사카]] 공대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의 사회인야구|사회인야구]] [[NTT]] 서일본 팀[* 당시 팀명은 '''[[일본전신전화공사|전전]] [[긴키]](電電近畿)''']에 입사, 1961년 [[오사카]] 지역대회 에서 니혼신약 팀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1962년 제 33회 도시대항 야구대회 1회전에서 [[에비스(맥주)|니혼맥주]]를 상대로 무려 21과 1/3이닝 동안 270개를 던지는 강견을 자랑했다.[* 이날 9회부터 등판하여 나가야스와 같이 22회 까지 던진 니혼맥주의 투수가 [[오가와 겐타로]] 였고, 공교롭게도 오가와 또한 후일 [[검은 안개 사건]](오토바이 레이스 불법 [[도박]])에 연루되어 나가야스와 더불어 [[NPB]]에서 [[영구제명]] 당했다.] 그날 시합은 22회말 1아웃 상황에서 니혼맥주의 오타 마코토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패배했지만, 당시 나가야스의 투구수 270개는 아직도 도시대항 야구대회 한 경기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파일:nagayasu_masayuki.jpg]]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의 나가야스 1962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여 주로 중간계투로 활동했지만, 1965년 시즌 40경기에 출장했고 그중 10경기를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 '''10승 3패 평균자책 1.93'''의 준수한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 시즌은 평범 이하의 성적을 남겼고, 1967년 웨이버 공시되어 이듬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2시즌을 플레이한 뒤 후술할 '''[[검은 안개 사건|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196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6시즌 통산 성적은 '''133경기 등판, 17승 17패 평균자책 2.81.''' == [[검은 안개 사건]] == 1969년 정규시즌 도중 [[요미우리 신문]]과 호치 신문이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소속 [[외국인 선수]] [[칼 보레스]]의 '''"경기 중에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 동료가 있다"'''는 제보를 바탕으로 취재를 진행한 결과 나가야스가 [[야쿠자]]와 결탁하여 [[승부조작]]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포착, 그해 10월 8일 그 전모를 보도했고 일본 야구계는 물론 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해 7월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난카이 호크스]] 와의 원정 경기에 등판한 나가야스는 난카이 타선에 된통 두들겨 맞았음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당시 니시테츠 구단 사장인 '''쿠니히로 나오토시'''가 직접 나가야스를 불러 '''"자네 [[승부조작]] 하는거 아닌가?"''' 라고 물었는데 나가야스는 부정도 긍정도 않은 채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쿠니히로 사장은 그의 태도에서 ''''이놈은 [[승부조작]]범이다'''' 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요미우리, 호치 신문의 취재 시 승부조작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쿠니히로 사장은 '''"구단 내부에서도 극비 조사를 실시했다. (승부조작은)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당시 니시테츠 [[감독 겸 선수]]이던 [[나카니시 후토시]]는 승부조작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구단주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치고 그 해 10월 22일 현역 은퇴와 동시에 감독직 사임 및 퇴단을 선언했다.[* 나카니시의 후임으로 [[이나오 카즈히사]]가 감독에 취임했고 나가야스의 [[영구제명]]이 확정된 이틀 후인 11월 30일, 쿠니히로도 구단 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승부조작 사실이 보도되고 [[후쿠오카]] 시내의 나가야스의 자택에 기자들이 몰려 들었지만, 나가야스는 "난 승부조작 같은건 한 적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무엇을 말한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이라 코멘트한 후 평상복 차림으로 외출하여 그 길로 자취를 감췄다. 이후 나가야스는 1969년 12월 본처와 [[이혼]]하고 세간의 눈을 피해 내연녀의 고향인 [[삿포로]]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이 나가야스 건으로 발각된 승부조작 사건은 이듬해인 1970년 3월 '''[[검은 안개 사건|검은 안개]]'''라 불리며 [[일본 국회|국회]]에서 까지 거론될 정도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고, 나가야스는 알고 지내던 '''주간 포스트''' [[기자]]이자 르포작가인 '''오오타키 죠지'''를 만나 ~~혼자 독박쓰기는 싫었는지~~ 자신과 더불어 승부조작에 연루된 니시테츠 팀 동료들 명단과 니시테츠 구단으로부터 입막음 댓가로 550만엔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이 인터뷰 내용은 주간 포스트, 내외 타임즈 등의 잡지와 [[후지 테레비]]의 심야 프로그램 '''텔레비전 나이트 쇼'''를 통하여 대중에 알려졌다.[* 단, 조작 연루자들의 실명은 숨겼다고.] [[파일:external/www.zakzak.co.jp/bbl1107120934000-p1.jpg]] 당시 기자회견 장면(사진 좌측 하단에서 두 번째가 나가야스) 1970년 4월 10일, 나가야스는 [[중의원]] 제 2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출두하여 승부조작 사실에 대해 실토하면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니시테츠 소속의 연루자 6명과 '''다나카 츠토무''', '''사토 키미히로''' 등 은퇴 선수들의 이름을 폭로했다. 나가야스의 발언에 대하여 니시테츠 구단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후 구단주 '''쿠스네 무네오'''가 갱생자금 명목으로 나가야스에게 돈을 건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밖에도 나가야스는 전 소속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도에이]]의 선수이던 '''모리야스 토시아키''', '''다나카 미츠구''' 에게도 승부조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여, 모리야스는 50만엔을 받았고 다나카는 이를 거절했지만 그 사실을 함구한 점도 밝혀졌다.[* 이후 모리야스는 [[영구제명]], 다나카는 엄중 경고조치로 둘의 희비는 갈렸다.] 더불어 수사 과정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이 [[오토바이]] 레이스 불법 [[도박]]에 가담했다는 사실도 들통났고, 다수의 선수들이 소환되면서 파문은 더욱 확산되었다. 나가야스는 1969년 11월 28일 커미셔너 위원회의 결정으로 [[영구제명]] 처분을 받고 야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내려진 영구제명 이었다. 그 외 연루된 선수들도 1970년 5월 죄목의 경중에 따라 [[영구제명]] 부터 출장정지, 근신, 엄중경고 및 주의 조치를 받았다. 이 때 나가야스를 포함하여 '''[[이케나가 마사아키]](니시테츠)'''[* 특히 이케나가의 제명처분은 니시테츠로선 최악의 치명타였다. 1965년 데뷔 첫해 20승에 신인왕을 차지한 이래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뽑았고, 1967년 시즌엔 23승으로 다승왕 타이틀 까지 따낸 [[이나오 카즈히사]]의 뒤를 이을 당시 24세의 젊은 [[에이스]] 투수를 잃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케나가 자신 또한 한창 그라운드에서 뛸 나이에 야구계에서 내쳐졌으니 절망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이케나가는 선배의 체면을 세워주려 어쩔 수 없이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재심의를 거쳐 2005년 4월 영구제명 조치가 해제되었다. 야구계로 돌아온 이케나가는 야구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다 2022년 9월 암으로 사망했다.], '''[[오가와 겐타로]]([[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심지어 이 인간은 1967년 시즌 '''[[MVP]]에 [[사와무라상]]을 받은 잘 나가던 에이스 급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건을 저질렀다. 일본판 [[마재윤]] 급.] 등 총 6명의 선수들이 [[영구제명]] 이란 오명을 뒤집어 썼다. 상세한 내용은 [[검은 안개 사건]] 항목 참조. == 이후 == 야구계에서 쫓겨난 나가야스는 [[삿포로]]에서 [[바(술집)|바]]를 운영했다고 하며 죽을 때 까지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주간신조 2005년 6월 9일자 기사를 통하여, 나가야스는 2003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1942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모리구치시 출신 인물]][[분류:1969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