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000> '''{{{#white {{{#!html 최초의 한인 사제}}}[br]{{{+2 김희준 마가}}}[br]金熙俊 | Mark Kim Hee-jun}}}''' || ||||<-5>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nglican_ordination_1914.jpg|width=100%]] {{{-2 {{{#000,#fff [[마크 트롤로프|{{{#000,#fff 마크 트롤로프}}}]] 주교 옆 [[성장(聖杖)|{{{#000,#fff 성장}}}]]을 쥐고 선 이가 김희준 마가 신부이다.}}}}}}}}} || ||<|2> '''{{{#white 출생}}}''' ||<-4>[[1869년]] [[12월 22일]] || ||<-4>[[경기도]] [[강화군]] [[강화읍|부내면]] 관청리 250[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22) || ||<|2> '''{{{#white 사망}}}''' ||<-4>[[1946년]] [[5월 11일]] (향년 76세)|| ||<-4>[[경기도]] [[강화군]][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 ||<|2> '''{{{#fff 재임기간}}}''' ||<-4>[[강화성당|{{{#000,#fff 강화성당 관할사제}}}]] || ||<-4>1925년 5월 ~ 1934년 9월 30일 || || '''{{{#white 기념일}}}''' ||<-4>[[12월 21일]] {{{-1 (첫 한인 사제 김희준 서품 기념일)}}} || ||<-5>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hite 학력}}}''' ||<-4>[[성공회대학교|성 미카엘 신학원]] {{{-2 (성직과정 / 수료)}}} || || '''{{{#white 종교}}}''' ||<-4>[[성공회]] || || '''{{{#white 가족}}}''' ||<-4>부친 김석구[* 金錫龜, 신명은 미카엘, 1842. 06. 03 ~ ?.], 모친 주씨[* 신명은 로라, 1845. 07. 04. ~ ?.][br]아내 배안나[* 裵安羅, 신명은 안나, 1877. 11. 30. ~ 1914.], 장녀 루시[* 金縷是, [[경기여자고등학교|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 1898. 11. 15. ~ 1933. 02. 22.], 장남 연성[* 金淵晟, 1906. 01. 07. ~ ?.], 차남 연화[* 金淵和, 1910. 03. 22. ~ ?.], 차녀 유시[* 金有時, 1913. 01. 13. ~ ?.] || ||<|2> '''부제서품''' ||[[1914년]] [[6월 7일]] || ||[[서울대성당|장림성당]] [[마크 트롤로프|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주례 || ||<|2> '''사제서품''' ||[[1915년]] [[12월 21일]] || ||[[서울대성당|장림성당]] [[마크 트롤로프|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주례 ||}}}}}}}}} || [목차] [clearfix] == 개요 == 김희준(金熙俊, Fr. Mark Kim Hee-jun)는 '''[[한국인]] 최초의 [[성공회]] 사제'''로, 신명은 [[마르코(복음사가)|마가]][* 현대에 와서는 '마르코'로 그 명칭이 수정되었다.]이다. 동시에 성공회 한국인 첫 영세자이자 견진자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신자, 견진신자, 전도사, 부제, 사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 생애 == 1869년 12월 22일, 조선국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관청리 250 에서 [[김해 김씨]] 김석구와 부인 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그는 인천 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1893년 7월, 당시 조선선교부 소속이었던 레너드 오틀리 워너(왕란도, Leonard Ottley Warner) 신부와 만나게 된다. 1896년 워너 신부가 떠난 강화지역에 후에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승좌하는 [[마크 트롤로프]] 당시 신부가 [[존 코프]] 주교의 명을 받들어 오게 된다. 이때 [[마크 트롤로프]] 신부는 전임 워너 신부와 친분이 있었던 김희준의 가정과 함께 기거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1월 7일 김희준은 [[내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게 되니, 조선인 최초의 영세자였다. 이후 1901년 [[마크 트롤로프]] 신부는 그에게 전도사로서 강화 내리로 갈 것을 명했고 그는 그 명에 따라 내리에서 1908년 까지 사목했고, 1908년 2월부터는 백천전도구로 파견되어 배천교회에서 사목하였고, 특히 그 해 10월 성당을 축성하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1914년 1월 1일, 강화 [[성공회대학교|성 미카엘 신학원]]에 입학하여 성직서품을 위한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성 미카엘 신학원의 공식 설립일은 1914년 4월 30일이나, 1914년 1월 1일부터 김희준(마가)와 구건조(바나바) 두 전도사의 성직서품을 위한 교육이 강화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그해 6월 7일 조선인 최초로 부제품을 받게 된다. 이들의 성직서품이 불과 6개월 만에 성사된 까닭은 교구장 [[마크 트롤로프]] 주교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후보자들이 서품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의 오랜 노력과 유능하다는 인정, 그리고 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봉사의 결과였다. 그래서 성직고시라던가 신학원의 교육과정 등 앞으로는 성직지망자들에게 늘상 부과될 그런 조건들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조치를 취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품을 베풀게 된 것은 장래 한국 교회의 선교를 담당할 한국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신중한 우리의 의지를 밝히는 뜻에서 이번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 >"The Bishop's Letter", MC, Vol. 25, No. 141(July, 1914), p. 73. 위와 같은 이유와 더불어 김희준(마가)와 구건조(바나바)는 이미 10년 넘게 전도사로서 지방 곳곳에서 사목한 전력이 있으며, 신학교에서 신학생 겸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신학에 깊은 조예가 이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학교에서 김희준 신부의 과목은 '교회사'였다.] 부제서품 후 첫 부임지로 진천전도구로 발령받아 1년 정도 사목하다가[* 그러나 그는 이 곳에서 큰 슬픔을 당하니, 바로 그의 아내 배씨의 죽음이었다.], 1915년 12월 21일, [[서울주교좌성당|장림성당]]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게 된다. 사제수품 후 첫 부임지는 음성전도구 관할사제였다. 음성지역에서 3년여간 봉직한 후 1918년 4월 29일에는 진천전도구 관할사제가 되었으나, 8개월 정도 봉직하다가, 1919년 2월 21일, 그의 고향인 강화의 강화남부전도구([[온수리성당]] 등 12개 성당) 관할사제로 발령받아 3년여간 봉직한 후, 다시 이번엔 천안전도구 관할사제로 발령받아 1년 반 정도 봉직하다가, 1925년 5월, 고향 강화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 강화북부전도구([[강화성당]] 등 8개 성당) 관할사제 발령이었다. 강화북부전도구에서 근 10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10월 1일 부로 직위교체되어 강화북부전도구 보좌사제로서 봉직하게 된다.[* 다만 이는 징계성 인사가 아니고 그의 나이를 고려한 배려이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로,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했을 때 이미 고령이었다.] 그리고 1938년 6월 30일, 사제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이후 1946년 5월 11일,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 기타 == * 공교롭게 [[천주교]] 기준 최초의 한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김해 김씨]]이다. [[분류:강화군 출신 인물]] [[분류:대한민국의 성공회 신부]] [[분류:1869년 출생]] [[분류:1946년 사망]] [[분류:김해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