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천마도|[[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width=60]]]] [br] '''[[풍월주#s-3|{{{+1 {{{#ffffff 신라의 풍월주(風月主)}}}}}}]]'''[br],,[[박창화|{{{#ffffff 박창화}}}]]{{{#ffffff 가 필사했다고}}} [[위서|{{{#ffffff 주장하는}}}]] [[화랑세기|{{{#ffffff 화랑세기}}}]]{{{#ffffff 의 기록}}},, || || 26대 진공 || {{{+1 ←}}} || '''{{{#ffffff 27대 김흠돌}}}''' || {{{+1 →}}} || 28대 오기공 김오기 || 金欽突 (? ~ 681년) [목차] == 소개 == [[신라]]의 귀족, 군인.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의 난]]의 주모자. 여러모로 [[고려]] 초기의 유력 [[호족(한국사)|호족]]이었던 [[왕규]]와 비슷하다. == 생애 == [[삼국통일전쟁]]의 공신으로 661년 7월 17일 대당장군에 임명되어 [[백제]] 부흥군 정벌에 참가해 시이곡정까지 진격했으며 668년 6월 21일 [[김인문(신라)|김인문]], [[김흠순]], 문충, [[진복]], 지경, [[김양도]], [[김개원]] 등과 함께 대당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가, 공을 세워 [[파진찬]] 벼슬을 제수받았다. 한편 김흠돌의 딸을 즉위 이전 신문왕의 [[태자비]]로 들일만큼 승승장구했다. 자세한 활약이 사서에 나오지 않지만 쟁쟁한 인물들과 함께 싸웠고 왕가와도 [[사돈]]까지 된 인물임을 보면 역전의 용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는 문무왕 말년에 이르러, 신라 내 불만세력을 모아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무왕은 꾸준히 왕권 강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고 단순히 골품과 문벌로 출세한 귀족들을 강하게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김흥원]], [[진공(신라)|진공]] 등 여러 귀족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을 통일해 권위가 높던 [[문무왕]] 시절에는 은밀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록을 종합해보면 왕위 교체기의 허점을 노렸던 것으로 보이나, [[신문왕]]은 이를 예상하고 즉위 직후 그와 뜻을 같이하던 [[김군관]]의 관직을 681년 8월 초 강등시켰다. 사실상 반란이 드러났음을 안 김흠돌은 681년 8월 8일, [[김흥원]], [[진공(신라)|진공]] 등과 함께 반란을 서둘러 도모했으나 패배한 후 죽음을 당했다. 이후 딸 김씨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고 김흠돌이 반란을 도모한 일에 연좌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오늘날에는 김흠돌의 난이 삼국통일전쟁 [[공신]] 세력의 약화와 [[왕권]] 강화를 꾀했던 신문왕이 유도했거나 없던 일을 조작해서 김흠돌에게 뒤집어씌운 [[숙청|숙청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27대 [[풍월주]]로 [[김유신]]과 영모 사이에 낳은 딸 중에 차녀인 김진광의 남편이라고 나온다. [[분류:신라의 인물]][[분류:681년 사망]][[분류: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