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인물]] [include(틀:신라 추존 국왕)] ---- [include(틀:신라 왕실)]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추존 국왕[br]{{{+1 명덕왕 | 明德王}}}'''}}} || || '''본관''' ||[[경주 김씨]] || || '''휘''' ||효양(孝讓) || || '''부왕''' ||흥평왕(興平王) 김위문 || || '''아들''' ||[[원성왕|김경신]] || || '''종교''' ||[[불교]] || || '''시호''' ||'''명덕대왕(明德大王)''' || || '''골품''' ||[[진골]](真骨) || || '''관등''' ||[[대각간]](大角干) || [목차] [clearfix] == 개요 == 金孝讓 ? ~ ? [[신라]]의 [[왕족]]이자, [[추존]] 국왕. 본관은 [[경주 김씨]].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에서는 왕족이라서 성씨를 생략하고, 그냥 간단하게 '''효양'''이라고 남아 있다. == 생애 == 신라의 제38대 임금인 [[원성왕]] 김경신의 아버지로, [[진골]] 고위 [[귀족]]이었지만 [[고대사]] 기록의 부족으로 살아있을 때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절(불교)|사찰]] 무장사(鍪藏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대로 신라의 보물 [[피리(악기)|피리]] [[만파식적]]을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이를 아들 원성왕에 물려주었다.[* 이후 [[일본]]이 사신을 보내 만파식적을 노리자 거절한 후, 창고 깊은 곳에 보관했다 하며 이후 만파식적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사망할 때의 관등은 최고 관등인 [[대각간]]. 나중에 후사 없이 37대 왕 [[선덕왕]]이 사망한 후, 아들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죽은 아버지를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이때 고조부 김법선(金法宣), 증조부 김의관(金義寬), 할아버지 김위문(金魏文)도 함께 각각 대왕으로 추존하였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종묘]]인 5묘에서 [[성덕왕|성덕대왕]]과 개성대왕[* [[선덕왕]]의 아버지 효방.]의 2개 묘당을 헐고, 그 자리에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을 넣어 5묘로 정했다.[* 5묘에서 나머지 세 자리는 원래 있던 [[미추 이사금|시조대왕]]과 [[불천위]]로 정해져있던 [[태종 무열왕|태종대왕]], [[문무왕|문무대왕]]. 원성왕부터 무열왕계는 아니지만 무열왕과 문무왕은 [[삼한일통]]의 업적을 부정할 순 없어 바꾸지 않았다. 사실 [[태종 무열왕]]은 [[원성왕]]의 증외고조부(증조할머니의 아버지)이기도 해서 모셔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증조 세대에 해당하는 증조할머니는 따로 모시기 애매해서 그냥 [[문무왕]]을 배알한 듯.] 왕통이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바뀌었으니 원성왕이 자신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분류:신라의 추존 왕]][[분류:경주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