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혁}}}'''[br]'''金赫[* 金'''{{{+1 爀}}}'''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혁2.jpg|width=100%]]}}} || || '''본명''' ||김학소(金學韶) || || '''이명''' ||김오석(金五石) || || '''호''' ||오석(吾石, 烏石) || || '''본관''' ||[[경주 김씨]][* [[http://www.yongin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532|#]]. 계림군파-갈천공파 21세 '''학(學)''' 관(冠) 항렬. 아버지 김태식(金泰植)은 20세 식(植) 항렬.] || ||<|2> '''출생''' ||[[1875년]] [[10월 6일]][*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354|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0월 16일로 기재되어 있으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925|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10월 6일로 기재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 || ||[[경기도]] [[용인시|용인현]] 기곡면 농사동[br](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 || ||<|2> '''사망''' ||[[1939년]] [[4월 23일]] (향년 64세)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32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5년 10월 6일 경기도 용인현 기곡면 농사동(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의 양반가에서 [[대한제국]] 때 법부 참서관을 지낸 아버지 김태식(金泰植)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현숙[* 윤헌식(尹憲植)의 딸이다.] 사이의 [[외아들]]로 [[https://www.yonginilbo.com/mobile/article.html?no=84258|태어났다]]. 8세 때부터 10년간 고향 용인현에서 맹보순(孟輔淳)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한성부]]로 이주하여 북서 가회방 재동계 맹현(孟峴)[*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 거주했다. 1898년 6월 22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로 뽑혀 사관교육을 받았으며, 1900년 1월 17일 졸업하고 같은 달 19일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였다. 그해 7월 23일 그는 [[대한제국군 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었고 1901년 7월 9일 6품으로 승륙(陞六)되었다. 1902년 4월 24일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3대대로 옮겨졌고 1903년 4월 6일에는 육군 부위(副尉)로 승진되었으며, 1905년 4월 18일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었다. 1906년 4월 22일 동 소속 대대에 부관으로 임명되었다.[[http://db.history.go.kr/id/im_101_03925|#]] 그 뒤 육군 정위(正尉)를 거쳐 참령(參領)으로 진급했다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해산|대한제국군이 해산을 당하자]] 일제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용인군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중화민국]] [[랴오닝성|봉천성]] 동변도(東邊道) 무송현(撫松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푸쑹현(撫松縣).]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8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0192|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애국청년들을 모아 흥업단(興業團)을 조직, 단장에 김호를 추대하고 김혁은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경에는 봉천성 동변도 [[안도현(중국)|안도현]](安圖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중국)|안투현]].] 삼인방(三人坊)에서 [[홍범도]]·[[지청천]] 등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해 10월 [[청산리 전투]]를 겪은 다음 이듬해인 1921년 1월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밀산현(密山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미산시(密山市).]에서 [[서일]]·홍범도·지청천·[[김좌진]] 등과 합세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용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10개 독립군단체를 통합,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프리모리예 지방|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1925년 3월 15일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이후 신민부가 길림성 의란도 목릉현(穆棱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 소추풍(小秋風)에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75514&categoryId=46623|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을 겸임하여[* 부교장은 당시 신민부 군사위원장을 맡았던 [[김좌진]] 장군이었다.] 500여 명의 사관생도를 양성, 독립운동 요원을 안정적으로 배출하였다. 그 뒤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국민혁명군|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합작하고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을 편성, 항전하였다. 1927년 2월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143501&categoryId=39994|중동선]](中東線: 동청철도) 석두하자(石頭河子)[*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스터우허쯔진(石頭河子鎭).]에서 신민부 총회를 개최하던 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고 항전하다, 박경순(朴敬淳)·[[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98|유민식]](兪民植)·[[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2434|이춘섭]](李春燮) 등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1928년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9년 6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징역 7년형을 [[http://db.history.go.kr/id/su_009_1929_06_05_0420|구형받았다]]. 이후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 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35년 5월 28일 병으로 [[http://db.history.go.kr/id/npda_1935_05_28_w0002_0270|가출옥]]했다. 이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평동(종로구)|평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종로구)|평동]] 112번지 [[돈의문]] 부근에서 거주하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39년 4월 23일 순국했다. 향년 64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985년에는 '오석 김혁선생 독립운동기념비'가 건립됐으며 2008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강남대학교]] 부근에 그의 이름을 딴 '김혁공원'이 조성되었다.[[http://www.yongin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729|#]]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경주 김씨 계림군파]][[분류:기흥구 출신 인물]][[분류:1875년 출생]][[분류:1939년 사망]][[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