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시중)] [include(틀:신라 추존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장안국 초대 국왕[br]{{{+1 헌창왕[* 정식 [[묘호]]나 [[시호]]가 없는 군주는 왕호로 그냥 휘호가 사용됐다.] | 憲昌王}}}'''}}} || ||<|2> '''출생''' ||연대 미상 || ||[[통일신라|신라]] || ||<|2> '''사망''' ||[[822년]] || ||[[통일신라|신라]] [[웅진성|웅천주]] || ||<|2> '''재위''' ||'''{{{#fbe673 장안왕}}}''' || ||[[822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강릉 김씨]] || || '''휘''' ||헌창(憲昌) || || '''부친''' ||[[김주원(신라)|김주원]] || || '''아들''' ||[[김범문]] || || '''왕호''' ||'''장안왕(長安王) / 헌창왕(憲昌王)''' || || '''골품''' ||[[진골]](眞骨) || || '''관등''' ||[[이찬]](伊飡) || || '''직위''' ||[[시중]](侍中)[* 제2 등위인 이찬 관등에 최고위직 시중 직위까지 받았지만 왕가의 견제로 한직에 밀려난다.][br]무진주 도독(武珍州 都督)[br]청주 도독(菁州 都督)[br]웅천주 도독(熊川州 都督) || || '''연호''' ||경운(慶雲, [[822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 말기의 [[귀족]]. [[무열왕]]계의 유력 인물이자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명주]]로 좌천된 [[김주원(신라)|김주원]]의 아들이자 [[김헌창의 난]]의 주도자. [[장안국]]의 왕. == 생애 == [[애장왕]](800~809) 대에 [[이찬]](伊飡)이었다가 807년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후 다시 이찬을 지냈다. [[헌덕왕]](809~826)대에 813년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 도독이 되었다가 8월에 중앙으로 부름을 받아 시중이 되었다. 816년 외직으로 나가게 되면서 청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가 아니라 경상남도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 일대이다. 한자로는 청주(菁州)이다. 경덕왕대에 강주(康州)가 되었으나 그 뒤에도 청주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도독이 되었다. 821년 [[웅주]](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옛 [[백제]] [[웅진]]) 도독이 되었고 822년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킨다. 다만 시점을 보면, 정말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흥덕왕]](826~836)이 태자가 된 것이 더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건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고[* 김주원은 김경신과의 갈등 끝에 김경신(원성왕)이 왕위에 오름]김헌창은 그동안 정계에서 잘 있다가 이제 와서 명분으로 내세우기에는 좀 뜬금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원래는 모종의 이유로 [[헌덕왕]] 바로 다음 순번으로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모양. [[원성왕]]의 차남 김의영과 혈연관계로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헌창은 본인이 도독으로 부임해 있던 공주에서 신라 조정에 대항해 장안국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4주의 도독들과 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해 [[부하]]로 삼는 등 크게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녹진(祿眞)의 지휘 아래 한산주(漢山州), 우두주(牛頭州), 삽량주(歃良州), 패강진(浿江鎭), 북원소경(北原小京) 등의 여러 성에서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알고 성을 지켰으며 [[헌덕왕]]이 파견한 신라군과 맞서 싸웠지만 도동 고개, [[삼년산성]], [[속리산]], 성산 등 여러 곳에서 패해 도망가서 웅진에서 농성했다가 10일만에 함락되려고 하자 패배를 직감하고 [[자결]]했다. 김헌창이 자결하자 김헌창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지만, [[웅진성]]을 함락한 신라 중앙군은 반역자 김헌창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다시 [[부관참시]]했다.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나타나 4일만에 죽었는데 김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고 한다. 아들 [[김범문]]은 피신해 [[북한산]]에서 [[산적]]에 의탁해 3년간 지내고 남평양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재차 난을 일으켰지만 크게 호응이 없었는지 한산주 도독에게 [[토벌]]당했다고 한다. == 둘러보기 == ||<-5><:> [[장안국|장안국의 역대 국왕]] || ||<:> 건국 ||<:> {{{+1 ←}}} ||<#dcdcdc,#000000><:> 초대 김헌창 ||<:> {{{+1 →}}} ||<:> [[김범문]] || [[분류:신라 국왕]][[분류:비정통 군주]][[분류:822년 사망]][[분류:신라의 왕족]][[분류:강릉 김씨]][[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아시아의 작위 요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