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897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파일:김향화.jpg|width=200px]] || || 성명 ||<(> 김향화(金香花) || || 본명 ||김순이(金順伊) || || 생몰 ||<(> [[1897년]] [[7월 16일]] ~ [[1950년]] || || [[출생지]] ||<(> [[한성부]]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추서 ||<(>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8년에 편친된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본명은 김순이(金順伊)다. 1897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18세에 이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수원 권번(기생조합)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맵시 동동한 중등 키에, 성품은 순하고 귀염성이 있으며, [[검무]], [[승무]],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등 각종 기예에 능했다. 또한 탁음이 섞인 듯한 애원성(哀怨聲)의 목청은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게 한다고. 1919년, 당시 22세의 김향화는 수원지역 요릿집에서 가장 즐겨찾는 일등 예기(藝妓)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의 수원기생조합 취체역을 맡고 있었으며, 수원 유지 및 지식인들과 두루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29일]], 김향화 등 기생 33명은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당시 자혜의원으로 사용되던 [[화성행궁]]의 봉수당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동료들을 설득해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29일에 이르러 [[기생]] 약 30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밤에는 상인, 노동자 및 무뢰한 등이 시내 각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내지인([[일본인]]) 상점에 투석하고 창문을 파괴하는 등 폭행이 심해져 수원 경찰서원과 보병 및 소방 조원이 협력하여 경계 중이다. >---- >1919년 3월 '조선소요사건' 경기 수원지역 보고서 [[일본 경찰]]은 김향화를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했고, 그녀는 2개월 간 고문을 받다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된 뒤 그해 5월 27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이후 1919년 10월 27일에 가출옥되어 수원으로 돌아왔으며, [[서울]]로 옮겨 살다가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매장된 장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후손 역시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해 발굴한 수원[[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고,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