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김해시)] [목차] == [[삼국시대]] == 초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국|금관가야]]의 본고장이었다. 김해라는 이름의 바다 해 자에서도 확인할 수도 있다시피, 고대 해수면은 현재보다 5~6m 가량 높았고 당시 김해 주변은 바다였다. 이 시기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부산)|강서구]]와 [[수가동]] 일부에 해당하는 김해[[평야]]는 '김해만'이라 불리는 바다였고 김해 북쪽인 밀양벌판과 밀양 삼랑진에서 김해 대동을 가로지르는 낙동강 역시 바다였다. [[http://www.gimhae.go.kr/00204/00050/00051.web?amode=view&gcode=1186&idx=14|#]][[http://m.hannam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008|#]] 한마디로 현재의 [[거제도]] [[진도군]] [[강화도]] [[여수시]] [[고흥군]]같은 좁은 해로를 낀 반도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 덕분에 김해에서 나는 철을 해상교역하기에 매우 유리했으며 신라로부터 방어하기에 좋았다. 가락국 당시의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금관가야의 쇠락 원인을 해수면의 하강과 [[낙동강]] 하구의 퇴적으로 배후습지로 변하자 김해가 항구 기능을 상실해 무역로에서 밀려나버린 것에서 찾기도 한다. 또한 바다를 낀 지형도 무용지물이 되어 신라의 공격을 방어하기 힘들어졌을 것이다. == [[신라시대]] == 가락국이 [[신라]] [[법흥왕]] 때인 [[532년]]에 멸망한 뒤로는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삼국통일]]([[통일신라]]) 이후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에 해당하는 5대 [[소경]] 중 하나로서 680년 [[문무왕]] 때 금관소경이 되었는데, 757년 [[경덕왕]] 때 김해경(金海京)으로 개칭되었다. 이 것이 김해라는 지명의 시작. 822년 [[김헌창의 난]] 당시 김헌창 측에 호응하기도 했으나 신라군에게 진압당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한국사)|호족]] [[김인광]], [[소충자]], [[소율희]]가 김해를 다스렸다. == 고려시대 == 고려 초기에는 김주(金州) 등으로 불렸다. 김해부, 임해현으로 잇따라 격하되었다가 임해군[* [[조선]] [[선조(조선)|선조]]의 맏아들로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봉호가 여기서 따온 것.]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광종(고려)|광종]]대에 김해부로 지위를 수복하였으며, [[성종(고려)|성종]]대에는 [[영동도]] 안동도호부가 되었다가, [[목종(고려)|목종]]대에 안동대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이후 [[현종(고려)|현종]]대에 금주로 개칭되면서 방어사가 설치되었으며, [[충선왕]]대에 금주목, 김해부가 되었다. 당시 금주는 오늘날의 [[창원시]]와 [[함안군]] 전역을 통치하는 큰 고장이었다. 고려시대 김해는 [[남해]] 제일의 [[항구]]도시였으며, [[왜구]]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 조선시대 == [[이성계|태조]] 2년 [[경상도]]에 설치된 6개의 수관 중 하나였다. 이후 [[태종(조선)|태종]] 13년 김해[[도호부]]가 되었고, [[세조(조선)|세조]] 5년 김해진관을 설치했다. 이때 국방면에서 김해의 통제를 받은 고을은 오늘날의 [[창원시|창원]], [[함안군|함안]], [[고성군(경상남도)|고성]], [[통영시|통영]], [[거제시|거제]]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김해부사 [[서예원]]이 김해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초계군수가 튀자 덩달아 서예원도 도주하는 바람에 남아있던 의병장 [[김득기]], [[송빈]], [[이대형]], [[류식]][* 柳湜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중종 때 [[연은분리법]]을 일본인에게 유출했다고 사죄(死罪)에 처해져야 한다고 이야기 되던 유서종의 아들이다. 유서종은 다음 해에 사면되는 데 그 아들 유식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우다 전사했으니 죄를 면해준 보답은 넘치게 갚은 셈이다.] 넷이서 왜군을 방어하다 모두 전사했는데, 장군들을 모시기 위해 [[고종(대한제국)|고종]]대에 지어진 것이 동상동에 있는 사충단이다[* 두차례 옮겨진 것으로, 원래 위치는 동상동 873번지였다.]. 여담으로 서예원은 이후 삭탈관직당했다가[* 이전에도 [[회령군|회령]]에서 [[여진족]] 적진으로 군사를 깊숙히 보냈다가 다 날려먹어서 종성에 유배당했다가 [[백의종군]]한 적이 있다.]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에 협력하였으며, 이후 진주[[목사]]로 있다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했다. 또한 김해성이 함락된 이후 선조가 쓴 [[언문]]교서(국문교서)를 [[권탁]]이라는 무장이 받들고 김해성에 잠입해 양민들을 다수 구출하고 순국했는데, 권탁을 기리고 이 국문교서를 보관하기 위해 고종대에 선조어서각이 지어졌다. 그런데 다시 찾았기는 했지만 국문교서가 도난당하고, 어서각의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국문교서 진품은 [[부산시립박물관]]으로 보냈고, [[1989년]] 어서각도 현 위치로 이전하여 새로 지었다. 현재 어서각 경내에는 복사본이 보관중에 있다.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 김해군이 되었다가, 1년만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경상남도]] [[김해군]]이 되었다. 이때 김해군에는 22개 면[* 하계, 중북(하계), 상북(이북), 하북(이북), 생림, 상동, 하동, 좌부, 활천(좌부), 우부, 칠산(우부), 주촌, 진례, 율리(진례), 장유, 유하(장유), 덕도(가락), 가락, 명지, 녹산, 태야(녹산), 대산]이 있었는데, [[1906년]] 대산면을 창원군에 넘겨줬으며, 양산군에서 대상면과 대하면(이후 1914년 대저면으로 통합)을 넘겨받았다.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진영역]]이 개업했다[* 여담으로 당시 진영역 인근의 어느 마을은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마을이 부유해졌다고 한다. 이로인해 마을 이름이 부평이 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산군으로부터 대저면을 넘겨받았다. == [[일제강점기]] == [[1914년]], 부제 실시와 더불어 군면폐합으로 인해 면의 수가 14개[* 하계(진영), 이북(한림), 생림, 상동, 하동(대동), 좌부(김해), 우부(김해), 주촌, 진례, 장유, 가락, 대저, 명지, 녹산]가 되었다. 이후 좌부면, 우부면을 김해면으로 합쳤고, 하계면을 진영면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1942년]] 진영면이 [[진영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44년]] 하동면이 대동면으로 개칭되었다. == [[대한민국]] == [[파일:external/www.ynnews.kr/70192_44778_5356.jpg]] [[1970년대]] 김해읍 전경. 내외동 전체가 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www.ynnews.kr/70192_44782_5440.jpg]] [[1969년]] 외동으로 가는 길. 오늘날 [[1042번 지방도]]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www.ynnews.kr/70363_45050_87.jpg]] [[1974년]] 지내동의 모습. [[남해고속도로]](2차선 도로)와 [[14번 국도]](고속도로 아래의 길)가 보인다. [[김해군]]은 1970년대까지 경남에서 제일 큰 군이었다. 아직은 농업이 근본이던 시대, 김해는 드넓은 김해평야를 독차지하고 있었고 드넓은 평야는 [[비닐하우스]]로 채워졌다. 그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돈 되는 작물들이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 인구도 [[1966년]]에 19만 9천 명에 이르렀다. 당시 김해읍 인구는 4만 5천 명. 오늘날 [[한국지리]] 교과서나 참고서의 전국 인구 순위에 김해가 써있을 정도. [[1973년]] 대저면이 대저읍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부산이 점점 커지다가 읍으로 승격된지 얼마 되지 않은 대저읍과 남쪽의 명지면, 그리고 옛 덕도면 지역인 가락면의 동부지역이 [[북구(부산)|북구]]에 편입되었다. 대저읍이 대저1·2동이 되었으며(대저1동은 옛 대상면, 대저2동은 옛 대하면 지역), 명지면은 명지동, 옛 덕도면 지역은 강동동이 되었다. 곧이어 오늘날 김해세무서 자리에 군청을 이전하였다. [[파일:external/www.ynnews.kr/70192_44781_5429.jpg]] [[1981년]] [[김해시]] 승격 당시의 시청사. 오늘날 서상동 [[KB국민은행]] 자리에 있었다. [[파일:김해시 CI.svg|width=100]] [[1981년]]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었으며 위의 로고는 시 승격 당시부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김해시보다 더 오래된 로고도 있다. 바로 [[강화군]]과 [[안양시]].] [[1989년]] [[김해군]] 가락면과 녹산면이 부산 [[북구(부산)|북구]]에 편입되어 김해군은 더 이상 바다에 접하지 않게 되었다. 가락면은 [[가락동(부산)|가락동]], 녹산면은 [[녹산동]]이 되었는데, 이때 [[창원시/역사|의창군]]에서 천가면을 함께 편입하였다. 부산은 예전에 편입했던 [[북구(부산)|북구]] 대저1·2동, 명지동, 강동동과 함께 새로이 편입한 지역을 모아 [[북구(부산)|북구]]에서 분구하여 [[강서구(부산)|강서구]]를 신설했다. [[1995년]] 전국 [[도농통합시|도농통합]](시군통합)으로 인해 [[김해시]]와 [[김해군]]이 다시 하나가 되어 김해시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1990년]] 전후로 장유면 주민들이 부산 편입을 청원하고 나섰는데, 도청과 군청에서 거부해 버린 전례가 있다. [[2013년]] [[7월 1일]] [[장유(지역)|장유면]]이 장유1~3동으로 분동되었다. 동시에 김해군에서 시로 편입. 분동 찬반 투표는 찬성 50.1%, 반대 49.9%. 이 투표로 인해 분동이 되었는데, 문제는 이 투표에 참여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신뢰성도 없다. 물론 당시 인구가 13만이 넘어 분동을 해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각주][[분류:김해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