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김태석(동명이인))]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2> '''{{{+1 김태석[br]金泰錫}}}'''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태석의 얼굴.jpg|width=100%]]}}} || || '''창씨개명''' ||가네무라 타이시[br]金村泰錫|| || '''별명''' ||'''고문왕'''|| || '''본관''' ||[[경주 김씨]]|| ||<|2> '''출생''' ||[[1882년]] [[11월 23일]]|| ||[[평안도]] [[양덕군|양덕현]] 온천방 일양리[* 인근의 평암리와 함께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br](現 [[평안남도]] [[양덕군]] 일암리)[* [[http://db.history.go.kr/id/im_101_03808|#]]]|| || '''사망''' ||[[1950년]]경 {{{-2 (추정)}}}|| || '''직업''' ||교육인, 경찰, 중추원 참의, 관료|| || '''학력''' ||보통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사범대학|관립한성사범학교]] {{{-2 (졸업)}}}[br][[니혼대학]] 야간부 {{{-2 ([[법학]] / 3학년 / 중퇴)}}}||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등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우리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우리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추잡한 무리)들이니 [[선우갑]], '''김태석''', 김극일과 같은 흉적이라 >---- >- <[[독립신문]]> "칠가살(七可殺)", 1920년 2월 15일 1면 - [[일제강점기]]의 악명높은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 경찰]]로, 일본인 경찰들보다도 몇 배는 더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하여 '[[고문왕]]'으로도 불리었다. 참고로 [[고문]]과 [[조작]]의 계보가 있는데 그것의 1세대가 바로 김태석이며, 그 다음 2세대가 같은 친일 경찰 출신의 [[노덕술]]이고 3세대는 바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시절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다. == 일생 == 1882년 11월 23일, [[평안도]] [[양덕군|양덕현]] 온천방 일양리(현 [[평안남도]] [[양덕군]] 일암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1908년 3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해 4월부터 잠깐동안 평양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다가 곧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대학]] [[법학과|법과]] 야간부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 1910년 5월 충청남도 홍주보통학교, 1911년 4월 평양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교원생활을 했다. === 친일 행적 === ||[[파일:고쓰가히.jpg|width=200]]|| 그러다가 1912년 9월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전직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낌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함경북도]] [[웅기군|웅기]]경찰서, 평안남도 광양만(廣粱灣)경찰서, 평양경찰서를 전전하며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는데, 통역생으로 근무하던 1915년 평양경찰서장의 특명으로 항일 비밀결사 '일심사(一心社) 사건'의 일부를 취급하여 관련자 검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경무과 차석으로 있다가 1918년 3월 경무부 총감부 고등경찰과에 전직, 순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친일 경찰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 해 8월 경찰관제도의 변경으로 경기도 고등경찰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전과가 가히 어마어마했다. 1919년 9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일으킨 [[강우규]]를 체포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도록 공헌하였으며 그 밖에 연루자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913|허형]](許炯)과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240|최자남]](崔子南)·오태영(吳泰泳) 등을 검거하는 등의 공으로 경부로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 또 1920년 7월 밀정 김진규(金珍奎)를 이용하여 밀양폭탄사건의 관련자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4887|이성우]](李誠宇)[* 이명 李成宇]·[[곽재기]]·[[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1231|황상규]](黃尙奎)·[[윤세주]][* 이명 윤소룡(尹小龍)] 등 6인을 체포하여 취조 끝에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693|김병환]](金鉼煥)의 집에 폭탄 2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1921년 10월 말에는 밀정 김인규(金寅圭)를 이용하여 제2회 보합단(普合團) 경리부장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6610|김희중]](金熙重)을 검거, 취조하여 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 모의사실을 알아내고 [[황정연(독립운동가)|황정연]]과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1439|이춘구]](李春求)를 추가로 검거하기도 했다. 1922년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71205&categoryId=46623|황포탄의거]] 때는 [[중국]] [[상하이]]로 도항하여 [[김익상]]을 조사하기도 했으며, 체포 및 조사과정에서 온갖 고문과 악행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23년 8월에 경시로 승진되어 경기도 형사과장으로 근무하였고, 그 해 12월 16일 퇴직하였다. 경찰 퇴직 후 1924년 12월부터는 군수로 전임되어 경기도 [[가평군]]·[[연천군]]·[[부천시|부천군]] 등지의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38년 6월 경상남도 칙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전직하였는데 이때 당시 [[조선지원병]] 모병시험과의 업무도 겸하면서 청년 25명을 출병하도록 유인했다고 한다. 1940년 9월에 퇴직하면서 종(從)4위 훈(勳)4등에 서훈되었고, 1944년 6월에 중추원 칙임 참의에 선임되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pj_002_0070_0010|김태석의 친일 행적]] === 광복 후 행적 === || [[파일:해방 이후 김태석.jpg|width=250]] || [[8.15 광복]] 이후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발효되자 친구 이원찬(李源讚)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주하려다 실패하였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그해 3월 29일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이때 공판에 참석해서 보여준 언행이 가히 가관이다.[[http://db.history.go.kr/id/pj_003_0040|당시 공판기록]][* 시간이 있으면 읽어보기 바란다. 김태석이 얼마나 뻔뻔한 인간이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이 자리에서 자랑 같겠지만 독립운동가를 제법 구했다."[*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 반민특위 재판정에 섰던 염석진의 변명이 이와 매우 흡사하다.][* 비슷하게 무려 '''70명(!!)'''의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앗아간 악질 친일 [[밀정]] [[이종형]]도 자신이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애국자'라는 소리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로선 애국자는 한 사람도 잡은 일이 없고 도리어 도망시킨 일이 있다." >"그저 김태석은 죽어도 조선민족을 위하여 애썼으므로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전들 조선 민족의 한 사람인데 민족정신을 저버릴 수야 있겠습니까?" > "제가 경찰로 들어간 것을 말씀드린다면 경찰로 들어가서 흑백을 가려야겠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그저 한 '''고쓰가히(小使) 노릇'''[* 심부름꾼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다.] 밖에 더 한게 있겠습니까?" 이때 검찰관으로 입회하였던 [[곽상훈]]은 김태석의 이러한 [[철면피]] 같은 태도에 격분하여 "이때까지의 피고인의 진술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참으로 성현의 말과도 같고 가장 애국자 같이 보인다. 이렇기 때문에 본 재판을 가장 공정하게 진척시키려면 먼저 피고인의 머리를 정신분석하여 정신이상 유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공판에 재판장으로 입회한 [[노진설]]도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공판 당시 무기징역 및 50만원의 재산몰수 처분을 받고 복역하다 1950년에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 지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50년 이후에 행방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무려 '''1천 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들을 형사처리한 최악의 친일 경찰 [[김덕기]] 또한 1950년 이후로 행적이 끊어져 있는데, 모두 전쟁통에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실제로 김덕기는 [[6.25 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고 한다.] 김태석의 최후에 대해서는 [[6.25 전쟁]] 통에 북한의 인민군 손에 붙잡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고 그때 처형당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태석이 '국민들 앞에서 진솔하게 사과함과 동시에 정당한 죗값을 치르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한 셈. 그나마 비록 짧긴 했어도 군 요직에 있던 [[노덕술]]과 무려 '''반세기 넘게''' 만행이 공론화되지 않은 채 부를 누려온 [[하판락]]에 비하면 어느 정도 죗값은 치렀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 놈은 그 반민특위에서조차 무기징역 및 50만원의 재산몰수 처분을 받고 복역할 정도 악질 친일파였으니 처형과정도 상당히 비참했을 것이다. == 대중매체에서 == * 1990년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상순(배우)|김상순]]이 연기했다. * 2021년 8월 29일, 또다른 고문왕 [[노덕술]]과 함께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다루어졌다. [[분류:양덕군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분류:188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사범대학]][[분류:일본 제국 경찰/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