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의열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김철호}}}[br]金哲鎬'''}}}}}}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철호(독립운동가).jpg|width=100%]]}}} || ||<-2> 중국 중산대학 재학 시절, 의열단 동료 서응호(徐應浩)와 함께 찍은 사진.[br]우측 의자에 앉은 사람이 바로 김철호이다.[[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493|#]] || || {{{#ffffff '''호'''}}} ||국한(國汗) || || {{{#ffffff '''본관'''}}} ||[[김해 김씨]] || ||<|2> {{{#ffffff '''출생'''}}} ||[[1901년]] [[12월 17일]] || ||[[경상남도]] [[고성군(경남)|고성군]] 춘원면 동문동[br](현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 인근의 도천동·동호동·명정동·문화동·북신동·서호동·정량동·중앙동·항남동과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출생지인 태평동 22번지에 김용식·김용익기념관이 위치해 있다.[[http://www.utour.go.kr/01198/01965/01208.web?amode=view&idx=1755&|#]]] || ||<|2> {{{#ffffff '''사망'''}}} ||[[1950년]] [[8월 14일]] (향년 48세)|| ||[[경상남도]] [[통영시|통영군]] || || {{{#ffffff '''학력'''}}} ||[[통영초등학교|용남공립보통학교]][* 현 [[통영초등학교]]] {{{-2 (졸업)}}}[br][[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협성학교]] {{{-2 (고등과 / 졸업)}}}[br]중산대학 {{{-2 (중퇴)}}} || || {{{#fff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통일부장관|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김용식]]은 그의 조카이다.[* [[김용식]] 전 장관의 회고록인 『새벽의 약속』(김용식, 김영사, 1993) 27쪽을 보면, '내(김용식)가 중학교 4년 때 나의 숙부가 중국 관동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발각되어 서울지방법원 형사법정 제4호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구절이 언급되며, 김철호의 딸 김경자씨는 집안 친척인 김용식 전 외무장관이 펴낸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을 통해 부친이 항일투쟁 활동을 한 사실을 알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보훈처에 포상신청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7799|#]] 그러므로 김용식 전 장관이 언급한 숙부는 곧 김철호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카 김용식은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 전 청진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는 등 친일협력 경력이 있다.] == 생애 == 김철호는 1901년 12월 17일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동문동(현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통영초등학교|용남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찍이 상경하여 1925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협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고, 그해 [[중국]]으로 유학, [[광둥성]] 소재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하여 [[김산]]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중산대학 재학 중에 [[김원봉]]·오성륜(吳成崙)의 권유로 1926년 8월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동시에 당시 의열단이 본부를 [[상하이]]에서 광동 지역으로 옮기면서 민족전선의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끌던 유오한국혁명동지회(留奧韓國革命同志會)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0월 상부로부터 일제침략 원흉 처단과 주요 건물을 파괴할 지하조직을 국내에 결성하라는 '국내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아 표면활동을 벌이는 한편 비밀리에 동지를 포섭하면서 의열투쟁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중국에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서응호(徐應浩)가 귀국하자 1929년 11월 열리게 될 조선박람회를 기회로 삼아 일대 거사를 계획하다가 서응호·윤충식(尹忠植) 등과 함께 1929년 10월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9년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튿날 출옥하였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70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5223&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 출옥 후에는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충신과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구상하던 그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같은 해 2월 경상남도 조사부 부위원장 겸 조사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당시 [[권총]]을 휴대하고 [[부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시]]에 은거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서병두(徐炳斗, 1899. 8. 10 ~ 1961. 2. 9)[* 창씨명은 오오야마 헤이토(大山炳斗), 족보명은 서병두(徐丙斗).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서정화(1933)|서정화]]의 부친으로 김철호와는 용남공립보통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동래고등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읍회 의원 및 경찰서 고문을 지냈으며, 지원병 모집에 큰 열의를 보였다. 대서소를 경영하기도 했는데, 해방 후에 부산으로 도피하여 은둔하였다.[[http://www.geoj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46|#]]]를 찾아가 체포하려 했으나,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차마 왜놈들을 거역하지 못했다, 친구야, 처자식을 생각해 한번만 살려줘'라는 말에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후 경찰서장 직위를 제의받았으나 "해방이 됐는데 왜 내가 조선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해야 하느냐"며 거절하기도 했다.[[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493|#]]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어느 날, 그는 서병두를 비롯한 통영 지역의 친일파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세력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강제 연행되었으며[[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91088|#]], 같은 해 8월 14일경 고향 통영군에서 민간인 학살에 희생당했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626|#]]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의열단/단원]][[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통영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김씨]][[분류:1901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