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김중석}}}[br]金仲錫'''}}}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중석.jpg|width=100%]]}}} || || '''출생''' ||[[1883년]] [[5월 16일]] || || '''사망''' ||[[1966년]] [[6월 11일]] || || '''묘소''' ||주소 || || '''본관''' ||[[전주 김씨]]|| || '''본적''' ||[[함경남도]] [[함흥]]|| || '''서훈''' ||건국포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9년 함흥군 함흥면(咸興面) 내에 있는 사립(私立) 영신학교(永信學校) 교사로 있을 때, [[평양]](平壤) [[숭실학교]](崇實學校) 교사인 [[강봉우]](姜鳳羽)가 함흥으로 와서 기독교계 간부들을 모아놓고 국권회복에 관해 연설을 하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결심하였다. 같은 해 2월 28일 기독교예배당(基督敎禮拜堂)에 모인 이근재(李根哉)·[[한영호]](韓泳鎬) 등이 함흥 장날인 3월 3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는 계획에 참가, [[대한독립선언서]] 3,000여매를 등사하고 태극기 10여매를 제작하는 한편, 학생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책임부서를 정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거사 당일 아침에 일경에게 시위계획이 탄로되어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7월 3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교편을 잡으면서 은밀히 한국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으며, 1938년에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일제강점기 당시 1925년에 이승만의 독립노선에 따라서 조직된 기독교 계열의 항일비밀결사이다.]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전주 김씨]][[분류:함흥시 출신 인물]][[분류:1883년 출생]][[분류:1966년 사망]][[분류:건국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