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준경}}}'''[br]'''金駿卿'''}}}}}}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준경(독립운동가).jpg|width=100%]]}}} || || '''본관''' ||[[강릉 김씨]][*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5129|독립운동인명사전]]. 한림공파(翰林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횡성파(橫城派) 36세 경(卿) 항렬.] || || '''호''' ||갑천(岬川) || ||<|2> '''출생''' ||[[1924년]] [[4월 22일]][* [[음력]] [[3월 19일]]] ||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하대리 || || '''사망''' ||[[1973년]] [[5월 5일]] (향년 49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924년 4월 22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하대리에서 아버지 김연덕(金演德, 1895. 11. 1 ~ 1954. 6. 3)[* 자는 달삼(達三).]과 어머니 [[초계 정씨]](1894. 9. 12 ~ 1951. 1. 5)[* 정현국(鄭顯國)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1919년 당시 횡성군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바 있던 둘째 당숙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할 염원을 [[https://kwnews.co.kr/page/view/2019081300000000110|갖고 있었다고 한다]]. 갑천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43년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중화민국]] [[후난성]] 구이둥현(桂東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천저우시]] 구이둥현(桂東縣).]에 배치되었다. 이후 [[허베이성]] 푸치현(蒲圻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셴닝시]] 츠비시(赤壁市).]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3702부대에서 복무하던 중 1944년 11월 탈영에 성공했고, 이후 [[국민혁명군]] 왕루지(王陸基) 휘하 신편 제15사 유격대에 편입되었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했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489|노재섭]](盧在燮)·한장석(韓長錫) 등과 함께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성되었다. 그 뒤 국민혁명군 제9전구 사령부 정치부에 파견되어 포로 심문 및 [[일본군]] 문서 번역, 전단·표어·벽보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국민혁명군 제15사단 유격대장의 요청으로 해당 부대 소속으로 유격활동에 종사하던 중 허베이성 [[스자좡시|스먼시]](石門市)[* 1947년 12월 26일 지금의 이름인 [[스자좡시]]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대원들과 함께 [[장시성]] 펑청현(豊城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이춘시]] 펑청시(豊城市).]에 집결했다가, [[후베이성]] [[우한시]] [[한커우시|한커우 지역]]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채원개]]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 1946년 귀국한 뒤 [[한국독립당(1940년)|한국독립당]] 행정위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찰대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경찰공무원]]에 입직했고, [[경정(계급)|경정]] 진급 후 1969년 강원소방과장, 1969년 8월 21일부터 1971년 8월 18일까지 [[https://www.gwpolice.go.kr/tb/sub06/sub06_03.jsp|제15대]] [[태백경찰서|장성경찰서]][* 1981년 [[태백시]]가 설치되면서 1981년 7월 1일 [[태백경찰서]]로 이름이 바뀌었다.]장, 1971년 8월 8일부터 1972년 6월 19일까지 [[https://www.gwpolice.go.kr/hs/sub06/sub06_03.jsp|제25대]] [[횡성경찰서]]장을 역임했다.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성실한 근무태도와 청렴결백함으로 인망이 높았으며 1973년 5월 5일 별세했다. 사후 광복군 경력을 인정받아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19년 장성경찰서장 시절 작성한 수기집 "피는 살어있었다"[* 피는 살아있었다가 정확한 표기이나 본인이 작성한 제목 그대로 옮겨 적었다.]가 [[https://kwnews.co.kr/page/view/2019081300000000110|공개되어]] 광복군 당시 행적이 재조명되었다. == 여담 == * 1945년 8월 10일, 국민혁명군 12사 전령이 "[[일본놈]] 망했다. 일본놈 망했다."라고 하며 일제의 패망 소식을 미리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에 전 장병들이 "한국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 실제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나흘 전인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하루 전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이에 8월 10일 오전에 [[일본 외무성]]과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포츠담 선언]]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0100&code=kc_age_40|조건부 수락한다며]] [[스위스]] 및 [[스웨덴]]의 일본 공사관을 통해 각서 형태로 미국에 전달되었다. 여기서 포츠담 선언을 조건부 수락한다는 것은,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미국의 요구대로 항복한다는 것이었다. [[분류:한국광복군/군인]]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분류:횡성군 출신 인물]][[분류:강릉 김씨]] [[분류:1924년 출생]] [[분류:1973년 사망]] [[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