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김재현 기관사.jpg|width=300]] || ||<-2> [[1946년]] [[파시형 증기기관차|파시 5형 기관차]]를 모는 모습 || ||<-2> [[파일:/image/277/2011/09/30/2011092800025681134_2.jpg|width=300]] || ||<-2> [[1950년]] 5월 찍은 사진. 참고로 이 사진은 [[철도박물관]]에 있다. || ||이름 ||金裁鉉[* 예안 김씨 26대손이라고 한다. [[http://cafe.naver.com/new20090101/441|출처]]] || ||출생 ||[[1923년]] [[9월 21일]] || ||사망 ||[[1950년]] [[7월 20일]] (향년 26~27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순직비.jpg|width=300]] || ||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 사진은 [[손병석]] 당시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참배하는 모습이다. 비는 [[1962년]] 세워졌으며 [[대전광역시]] 판암동 소재 [[경부선]] [[서울역|서울]] 기점 171.8km 지점 ([[대전역]] - [[세천역]] 구간)에 있다.] || [[6.25 전쟁]] [[대전 전투]]에서 미군들과 함께 '보급품 후송 작전'에 참여했던 [[철도 기관사]]로 [[1923년]] [[9월 21일]]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출생하였고 [[1950년]] [[7월 20일]]에 순직하였다. 위패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 생애 ==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철도국에 입사하여 대전기관차사무소 기관사로 일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한 이후 최초 참전 부대인 미 제24보병사단은 7월 5일 [[오산 전투]]부터 시작해서 후속부대들이 한국에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사력을 다해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다. [[제8군|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월튼 H. 워커]](Walton Harris Walker) 중장은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군|영동]]에 전개할 수 있도록 7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고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rishe Dean) 소장에게 명령한다. 이에따라 미 제24보병사단은 7월 20일까지 [[대전 전투]]를 치루며 지연 작전을 완수하고 철수를 결정하였고 철수 작전의 일환으로 [[윌리엄 F. 딘|딘]] 소장은 7월 20일 16시경 [[대전역]]에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철도)|화차]] 10량의 [[후송|후방 이송]]을 명령을 [[영동군|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하달하였다. 이러한 [[윌리엄 F. 딘|딘]] 소장의 명령에 의해 보급품 후송 작전이 착수되자 김재현 기관사는 부기관사에 해당하는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와 함께 자원하였고 [[미카형 증기기관차 |증기기관차 미카 3-219호]]에 [[탄수차]]만을 연결한 채 기관차에 올라 미군들을 싣고 7월 20일 16시 30분경 [[이원역]]을 출발하였으나 [[대전역]]으로 가는 도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탄수차]]에 총알 구멍이 생겼고 이로인해 물이 새면서 압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어렵사리 [[대전역]]에 도착하였으나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철도)|화차]] 10량을 연결시 기관차의 [[에너지|동력]] 부족으로 이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보급품 후송 임무를 포기하고 다시 [[옥천역]]으로 돌아가던 중, [[세천역]] 부근 [[구정리터널]]에서 매복해 있던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28살에 순직하였으며 김재현 기관사가 총에 맞아 즉사한 이후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도 총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어렵사리 [[옥천역]]에 복귀하였다. 자세한 작전 과정은 2021년 [[한국철도공사]]에서 제작한 [[https://www.youtube.com/watch?v=QMNHks-9bpg&t=777s|철도박사가 들려주는 한국철도 10대 사건 - 3️⃣ 한국전쟁 영상]]에서 작전 목적과 기관차 동승 미군과 관련된 팩트 오류 이외에는 거의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편 이 보급품 후송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7월 20일에 기관차를 운전할 기관사가 없어서 신호수였던 장시경 철도원이 직접 기관차를 몰고 미군들과 함께 한번 더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대전으로 들어갔다는 본인의 증언이 있었지만, 미군 측 기록 및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2/CMH_Pub_20-2.pdf|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에 따르면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했다 되돌아간 이후 딘 소장이 한번 더 [[영동군|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보급품 후송을 위한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17시에 기관차가 [[대전역]]을 향해 출발했다는 보고까지는 딘 소장이 받았지만 대전역에 도착은 하지 못 하였고 이 기관차를 [[대전역]]에서 기다리던 수송장교 레이몬드 D. 햇필드(Raymond Davidson Hatfield) 대위가 북한군에게 공격을 당해 전사하였다고만 기술되어있다.(수송장교 햇필드 대위는 이 보급품 후송 작전 중 전사한 공적이 인정되어 [[은성훈장]]이 수여되었다.[[https://valor.militarytimes.com/hero/105681 Raymond|Davidson Hatfield - Hall of Valor: The Military Medals Database]]) 그러나 이렇게 한국인 기관사들과 미군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철도)|화차]] 10량의 후방 이송에 실패하여 7월 21일 08시에 [[미국 공군|미 공군]]이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김재현 기관사의 유해는 동료들에 의해 영동산 아래에 묻혔다가 휴전 후 고향 논산으로 이장되었고, [[1983년]] 철도인으로는 처음으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영관급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은 역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외손자는 [[2005년]] 한국철도공사에 입사하여 대전광역시에 있는 시설장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외할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2011년]] 철도 기관사 면허를 땄다. ==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 ===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 === 현재 김재현 기관사의 공식 순직일은 [[국립서울현충원|국립서울현충원 묘비]], [[https://blog.naver.com/mpvalove/222433863230|국가보훈처 자료]] 등등에서 7월 19일로 기록하고 있으며,[[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5062500209204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25&officeId=00020&pageNo=4&printNo=16533&publishType=00020|1975년 동아일보 기사]]처럼 7월 19일을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로 보도한 과거 기사도 존재한다. 그러나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최초 증언이 실렸던 1953년 [[국토교통부|교통부]]가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서 현재영 부기관사는 7월 20일 16시 40분경에 [[대전역]]에 도착했었고 복귀하는 도중 북한군 총격으로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2/CMH_Pub_20-2.pdf|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에 7월 20일 16시 20분에 기관차가 [[이원역]]에서 [[대전역]]으로 출발하였고 역시 복귀하는 도중 한국인 기관사가 적의 총탄을 맞아 죽었다고 죽었다고 기술한 기록과 거의 일치하며,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정보참모부 (G2)]]의 보고서 역시 7월 20일 16시 30분경에 기관차가 [[대전역]]으로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https://24thida.com/books/books/Dean_general_through_capture.pdf|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미국 측 자료에서 일관되게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를 7월 20일 16시 20분부터 17시 사이로 기록하고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2121100329206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12-11&officeId=00032&pageNo=6&printNo=5269&publishType=00020|1962년 경향신문 기사]] 등의 자료에도 7월 20일에 김재현 철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종전 후 미군 측 기록들과 [[교차검증]]을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증언에만 의존한 기록들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순직일 및 작전 일시에 혼동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 김재현 기관사가 수행한 작전의 목적 === 그 동안 국내에서는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30명으로 구성된 미군 특공대(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는 '미군 결사대'로 명명)가 동승하여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일명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 중 김재현 기관사와 29명의 미군 특공대원들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의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서는 결사대 기록이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기록되어있고, 1983년 경위서의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서는 결사대 기록을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철도공사]]가 [[대한민국 철도청|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했던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의 [[각본|시나리오]] 같은 화제성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 및 언론 등이 '구출 작전'이 아니없음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특공대원들의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 및 [[교차검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용하고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대전역]]에 정차되어 있던 [[화차(철도)|화차]] 10량분의 탄약 등 보급품 후방 이송 작전이 와전된 것으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2/CMH_Pub_20-2.pdf|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과 [[https://24thida.com/books/books/Dean_general_through_capture.pdf|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등의 과거 자료부터 현재 기밀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정보참모부 (G2)]] 보고서 등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62416|최신 자료]]까지 모든 미군 측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에서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new.mnd.go.kr/user/imhc/upload/pblictn2/history_of_war_in_korea02/index.html|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에서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new.mnd.go.kr/user/imhc/upload/pblictn2/625_06/index.html|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문단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전쟁기념관]] 역시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http://archives.warmemo.or.kr/rsrch/detail/rsrchDetail.do?MID=UM00020&archvNttNo=3725|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미군 측 자료와 기록을 근거자료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동승한 미군을 '특공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호송병 30명이 동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 덧붙여 그 동안 북한군에게 포위된 상태의 대전에 남아있던 딘 소장을 구출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철도공사]]가 제작한 각종 전시물 설명문([[https://blog.naver.com/daejeondime/221600973873|한국철도공사 본사 김재현 동상 설명문]], [[https://blog.naver.com/ianhan/221414840689|호국철도기념관 김재현 전시물 설명문]]), 정부기관 게시물([[https://blog.naver.com/kr_blog/222121168047|국가철도공단 블로그]]) 그리고 언론 기사([[http://www.mcnews.co.kr/69852|매일건설신문 기획칼럼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2406551?sid=102|세계일보 기사]]) 및 영상콘텐츠([[https://www.youtube.com/watch?v=vpjMNKkuITY|국립서울현충원 교육용 애니메이션]], [[https://www.youtube.com/watch?v=NcMM1hYdoag|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등등에서 딘 소장이 아예 1950년 7월 19일에 실종 혹은 포로가 되었고 미군이 이 사실을 인지하여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하는 기관차를 통해 특공대를 투입하여 대전역을 수색하는 등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펼쳤다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자료들은 관련된 사건들의 발생 시점을 조작하여 끼워 맞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 왜곡]]으로 다시 말해 이러한 영화같은 구출 작전은 시간 순서상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왜냐하면 첫번째로 딘 소장은 7월 20일 18시경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대전 시내에서 부하들과 함께 북한군 탱크를 공격하며 정상적으로 제34연대 등 잔류 부대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7월 19일에 실종 혹은 포로가 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가 완전히 틀렸으며([[https://en.wikipedia.org/wiki/File:General_Dean%27s_Kill!.jpg|딘 소장의 직접 지휘하에 7월 20일에 격파된 탱크 사진]]), 두번째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2/CMH_Pub_20-2.pdf|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과 [[https://24thida.com/books/books/Dean_general_through_capture.pdf|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에 딘 소장이 7월 20일 16시경에 [[영동군|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보급품 후송 명령을 하달했고 이 명령 때문에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역]]으로 출발한 것이며,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은 했지만 [[화차(철도)|화차]] 견인에는 실패 후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는 사실까지 딘 소장과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가 보고 받았으며 그리하여 한번 더 보급품의 후송을 위해 기관차를 다시 보내라고 딘 소장이 재차 사단 지휘소에 명령을 하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2/CMH_Pub_20-2.pdf|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9)]]에는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를 [[대전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에게 김재현 기관사가 [[대전역]]에 도착한 이후 기관차([[탄수차]]) 손상에 이은 동력 부족으로 [[화차(철도)|화차]] 견인이 불가능함을 직접 보고하고 복귀하는 상황까지 기록되어 있다.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ul (pp. 168–169) 원문 발췌''' >'''"The locomotive had been sent to Taejon as the result of General Dean's telephone request to the 24th Division a little earlier. In midafternoon, Captain Hatfield tried to send a rolling supply point of ten boxcars of ammunition out of the Taejon railroad yard to Yongdong.Returning to the rail yard at the northeast side of Taejon, Hatfield discovered that the Korean crew had uncoupled the locomotive from the supply train and fled south in it. It was then that Dean had telephoned the division to dispatch a locomotive immediately to Taejon to pull out this train. The nearest rail yard was at Iwon-ni, fifteen miles southeast of Taejon. Only armed guards had kept the Korean train crews there on the job. Enemy fire on the locomotive from Iwon-ni punctured the water tender."''' >'''"Though under sniper fire at the railroad yards, Hatfield awaited the arrival of the locomotive. When it pulled into the yards more enemy fire hit it. The engineer said the locomotive was so damaged that it could not pull the train out.To Hatfield's dismay, the Korean engineer threw the locomotive in reverse and backed speedily southward out of the yard.At the tunnel southeast of Taejon enemy fire again swept over the locomotive and grenades struck it, killing the engineer. The fireman, although wounded, took the train on into Okch'on. Some American soldiers rode the train out of Taejon. According to 24th Division records, the time was 1645."''' >'''"Informed of this untoward incident, Dean again telephoned the division, and at 1700 he received a telephone call that it was sending another locomotive, this time under guard. Dean informed Hatfield of this and the latter waited at the rail yard. Hatfield was killed by enemy soldiers there while waiting for the locomotive that never arrived. The next morning at 0830 a U.S. Air Force strike destroyed the trainload load of ammunition and supplies still standing in the Taejon rail yard."''' 마지막으로 딘 소장이 실제 실종되고 포로가 된 시점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딘 소장은 7월 20일 5시 이후 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전보문을 [[영동군|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보내고 6시 이후 미 제24 보병사단 34연대의 잔류 병력과 함께 약 50여대의 트럭 등 차량을 이용하여 대전에서 철수했었는데, 그 후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차에서 내려 도보로 철수하던 중, 함께 가던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기 위하여 어둠 속에서 물을 찾아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면서 실종되었으며, 딘 소장이 포로가 된 시점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면서 홀로 낙오된 이후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 36일 동안 산천을 헤매다가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8월 25일이 되어서야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후술 부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딘 소장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군에서 명확하게 인식한 시점이 1951년 12월 18일 이후로 이 시점까지 미군에서는 딘 소장을 [[작전 중 실종|실종]] 중 [[전사(죽음)|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미군이 딘 소장의 실종 혹은 포로가 된 것을 인지한 후 특공대를 편성하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를 통해 대전으로 투입시켜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펼쳤다는 [[한국철도공사]] 등의 자료들은 완벽한 [[역사 왜곡]]이다. 한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509150233480550.pdf|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p. 166)]]에는 1950년 10월말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로 미군에서도 이때 딘 소장이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래도 미군에서는 북한군 포로의 진술보다는 정황상 [[전사(죽음)|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2월 16일에 [[명예훈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18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https://en.wikipedia.org/wiki/Wilfred_Burchett|월프레드 G. 버체트(Wilfred Graham Burchett)]]를 초청해서 인터뷰를 시키면서 딘 소장이 생존해 있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동승했던 미군의 정체 === 기존에는 기관차에 동승했던 미군들의 정체는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위한 미군 특공대(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는 '미군 결사대'로 명명)로 총원은 30명에 구출 작전 중 29명의 특공대원들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의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서는 결사대 기록이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기록되어있고, 1983년 경위서의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서는 결사대 기록을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정보참모부 (G2)]]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관차에 동승했던 미군들의 실제 정체는 보급품 후송 작전 지원 및 기관차 호위 임무를 맡았던 미 제24보병사단의 [[군수(군사)|병참부대 혹은 수송부대]] 소속의 일반 병사들로 하사 스몰우드([[서전트|Sergeant]] Elmo Smallwood), 상병 맥컬럼(Corporal James McCallum), 상병 르모앙, 상병 슈와르츠, 일병 시콜라, 이병 마호니 이렇게 6명이었으며 미군 사상자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군 병사의 한글 이름과 계급은 배은선 철도박물관장이 저술한 한국철도 역사책 '기차가 온다' (pp. 187–188)에서 차용] 여담으로 한국인 기관사들의 증언대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실행되었고 미군 특공대원이 대략 29명에서 32명이 전사한 것이 진실이었다면 이 미군들에게는 비록 작전에는 실패했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동료 미군을 구하기 위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 [[명예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이 추서되었을 것이다. 실례로 1970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특공대가 손타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구출 목적의 [[https://en.wikipedia.org/wiki/Operation_Ivory_Coast|Operation Ivory Coast]] 작전을 실행했었는데 비록 미군 포로들이 작전 실행일 이전에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실패하였지만 이 작전에 참가한 미군 특공대원들에게는 [[은성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 등이 수여되었다. ===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명 === 현재 김재현 기관사의 유품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소장, 전시 중이며 그가 운전했다고 알려진 미카 3-'''129''' 증기기관차는 [[2008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한 때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 정태 보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 현충원 내 위치한 호국철도기념관에서 야외전시 중이다. 그런데 당시 증언 및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한 기관차는 미카 3-'''129'''호가 아니고 미카 3-'''219'''호로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국 신문사 'The Atlanta Journal-Constitution'에 1950년 7월 21일자로 실린 기관차 작전 관련 기사에서 대전에 투입되었던 기관차 모델명을 '''Old 219'''(구형 기관차 219호 의미로 추정), 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에 실렸던 현재영 부기관사의 증언에서도 대전에 투입되었던 기관차를 미카3-'''219'''호로 기록하고 있으며, 1983년 7월 20일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작성한 자필 경위서에도 모델명이 미카 3-'''219'''호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황남호 본무기관조사는 아래처럼 구체적인 증언 기록을 남겼다. >'''"제가 혼자 살아 운전한 기관차 MK3 219호는 김천기관차 사무소에서 수리한 후 다시 전투에 수송업무를 한 후 20여년 사용되었으나 디젤차로 폐차되었습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2121100329206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12-11&officeId=00032&pageNo=6&printNo=5269&publishType=00020|1962년 경향신문 기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9062400209207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06-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4677&publishType=00020|1969년 동아일보 기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5062500209204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25&officeId=00020&pageNo=4&printNo=16533&publishType=00020|1975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 기사상에서도 미카 3-'''219'''호라고 정확히 기록되었지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108280020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8-28&officeId=00020&pageNo=10&printNo=18430&publishType=00020|1981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미카 3-'''129'''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기록이 내려오던 도중 '''129'''와 '''219''' 숫자 기재 과정에서 착오가 생기면서 이런 오류가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 ===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대로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참가한 작전의 목적은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대전역에 정차되어 있던 [[화차(철도)|화차]] 10량분의 탄약 등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국내에서는 [[한국철도공사]]와 [[국가보훈부]] 등에 의해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증거자료는 오로지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 그리고 당시 철도 군사수송담당관이었던 류기남(철도참전유공자회 회장)의 증언 이렇게 오로지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의 증언들뿐으로 30여명의 미군 특공대와 함께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는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이 1953년 교통부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 실린 것이 시초이다. 그 후 언론 기사 등에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이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는데 미군 측 공식 전사 등 미국 측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아무런 의심없이 공식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결국 철도공무원들의 증언 내용이 잘못되었던 것으로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통역 등의 부재로 미군들의 실제 작전 목적을 오해한 것이다. 즉 한국교통동란기에서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도 통역이 동행을 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아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미군들이 철도공무원들에게 작전 목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세하게 설명을 했더라도 통역이 없어 철도공무원들이 정확한 작전 목적을 이해하지 못 하였던 것이다. 특히 보급품 후방 이송은 당시 딘 소장이 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직접 내린 명령이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딘 소장의 이름이 언급이 되었고 이로인해 철도공무원들이 딘 소장을 구출하러 대전으로 투입되었던 것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번째, 1950년 7월 20일 작전 당시는 정확한 작전 목적을 몰랐지만 이후 '딘 소장'이 대전 전투에서 실종되었고 포로가 되었던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였던 철도공무원들이 1953년에 이 작전에 대해 증언하면서 자신들이 대전 전투 당시 긴급하게 기관차를 몰고 대전역으로 투입되었던 이유를 딘 소장이 실종되고 포로가 되었던 결과에 비추어 역으로 추론하면서 자신들이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전역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착각하였을 가능성이다. 위와같이 의사소통 문제 및 정보 부재로 철도공무원들이 작전 목적에 대한 오해 내지 착각을 하여 자신들이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고 잘못된 내용을 발언한 증언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지만, 동승하지 않았던 미군 특공대원 30명과 구출 작전 중 29명이 전사했다는(미군 특공대 혹은 결사대 기록을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기술한 자료도 존재) 허위 진술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존재한다. == 그 후 == [[2012년]] 미국 정부로부터 '미국 국방부 특별민간공로훈장(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Medal for Exceptional Public Service)'[* 이 특별민간공로훈장은 미국 국방부가 안보상 혁혁한 업적을 남겼거나 국방 조직·기능에 뛰어난 기여를 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것으로 미국 국방부에서 수여하는 훈장 중에선 민간인이나 외국인에게 주는 상으로는 최고의 훈격이다. 다만 미국의 서훈체계는 다양화 되어 있기 때문에 미 대통령이 수여할 수 있는 것, 육해공군에서 수여하는 것, 국방부가 수여하는 것, 의회가 수여하는 것 등 다양하고 각각의 최고 등급은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 전체에서 서훈 등급이 최고인 것은 아니다. 미국 전체에서 민간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 등급은 민간인에게 주는 명예장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수여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과 의회가 수여하는 의회 명예훈장(Congressional Gold Medal)이다.]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이 상을 받는 사람은 김재현 기관사가 최초이다.[[https://imnews.imbc.com/replay/2012/nwdesk/article/3084545_30413.html|관련뉴스]] 2015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두 철도공무원 역시 [[미국 국방부]]로부터 '국방부 특별민간공로훈장(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Medal for Exceptional Public Service)'을 수상했다. == 기타 == 이것을 소재로 한 만화도 존재한다. [[https://cafe.naver.com/hkct/286747|관련 글]] 다만 윗 문단에서 서술된 과거 잘못 알려진 사실 기반으로 제작된 만화이니 이 점 참고 요망. [[국립서울현충원]]에서 2011년에 공개한 [[미카 129]]라는 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 [[파일:20230722_195511.jpg]] 2023년 7월 22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대전 하나 시티즌]]과의 [[대구 FC]]의 경기에서 대전 서포터즈 소모임 대전의 아들이 영웅의 날을 맞아 김재현 기관사를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하였다.[[https://www.instagram.com/reel/CvBa2qvNkpa/?igshid=MzRlODBiNWFlZA==|#]] [각주] [[분류:논산시 출신 인물]][[분류:1923년 출생]][[분류:예안 김씨]][[분류:1950년 사망]][[분류:6.25 전쟁/사망자]][[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대한민국의 철도종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