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fff '''전 이평택 가문 묘지기[br]{{{+1 김응우}}}[br]金膺禹'''}}}}}}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응우역사왜곡.jpg|width=100%]]}}}|| ||<-2> 북한이 그린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기록화이다. || ||<|2> {{{#fff '''출생'''}}} ||[[1848년]] [[6월 17일]] (헌종 15년)[* 양력기준. 음력으로는 4월 8일]|| ||[[조선]] [[평안도]] [[평양부]] 중성리[br] (현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평양)|중성동]])|| ||<|2> {{{#fff '''사망'''}}} ||[[1878년]] [[10월 4일]] (고종 15년, 향년 30세)|| ||[[조선]] [[평안도]] [[평양부]] 고순화방 남동 [br] (현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 || {{{#fff '''본관'''}}} ||[[전주 김씨]] || || {{{#fff '''가족'''}}} ||아버지 [[김송령]]^^(1810~1899)^^[* 시대를 감안하면 오래 산 편이다. 그래서 자신의 증손자이자 훗날 [[김일성]]의 아버지가 되는 [[김형직]]이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영면했다.][br]어머니 나현직[br] 아들 [[김보현(북한)|김보현]][br]며느리 [[이보익]][br]손자 [[김형직]][br]증손자녀'''[[김일성]]''', [[김철주(북한)|김철주]], [[김영주(북한)|김영주]] 현손자녀 '''[[김정일]]''', [[김만일(북한)|김만일]], [[김경희(1946)|김경희]], [[김평일]], [[김영일(북한)|김영일]], [[김현(북한)|김현]], 김백연[br]내손자녀 [[김정남(북한)|김정남]], 김설송, 김춘송,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br]곤손자녀 [[김한솔]], [[김주애]]||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시대의 인물로 '''[[김정일]]의 고조부, [[김일성]]의 증조부'''. 그리고 '''[[김보현(북한)|김보현]]의 아버지'''이다. == 생애 == [[평양부]] 중성리에서 [[소작]]을 짓다가, 고순화방으로 이동해 지주 집안의 묘지기를 맡았다. 본래 [[김일성]]은 본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의 집안이 [[전라도]] [[전주시|전주]]에서 살다가[* 그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전주로 많이 몰렸다고 한다. 전주는 김일성의 연고지이니, 차마 인민군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 그러나 전주에서도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학살]]은 자행되었다.] 8대조인 김계상이 [[함경도]]로 이전하면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데, 중성리에서 농사를 짓던 김응우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지주]] 이평택의 묘지를 돌봐주기로 하고 [[만경대고향집|산당집]]을 한 채 받아 이주한 것이 [[김씨왕조|김씨 일가]]의 [[만악의 근원|시초라고 한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1878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사후의 [[역사왜곡]] == [[분류:북한의 역사왜곡]] 북한에서는 [[1866년]] 미국의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통상을 요구하다가 관민들에 의해 불타버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통솔자가 김응우라고 주장하며, 김응우를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선두에서 위훈을 떨친 애국자'''로 선생'''님'''[* 북한에서는 집단성과 동질성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김씨일가를 제외하고는 님이라는 호칭을 잘 붙이지 않는다.]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존경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북-미 혹은 한-미 관계의 시작을 제네럴 셔먼호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사건의 맥락을 [[제국주의]] 침략 야욕에 대한 조선 민족의 저항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 인물로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를 내세움으로써 [[백두혈통]]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김응우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은 '''당연히 [[개소리|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인 것이, 김응우는 당시 20살도 안 된 햇병아리 묘지기였다. 실제로 이 사건의 총 책임자는 당시 [[평안도]] 관찰사이자 [[박지원(실학자)|연암 박지원]]의 손자이고 당시 60을 바라보는 노련한 행정 관료인 [[박규수]]와 [[철산군|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 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군관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당연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다룬 당대 사료 그 어디에도 김응우 같은 인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묘지기인 김응우가 사망한 후에도 집은 그대로 김응우 일가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 곳에서 '''[[김일성]]'''이 태어나면서 집은 '''[[만경대고향집|만경대]]'''라는 이름으로 북한식 사적화가 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북한의 역사)] [[분류:김일성 가문]][[분류:1848년 출생]][[분류:1878년 사망]][[분류:전주 김씨]][[분류:평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