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학술원 회원)] [include(틀:조선어학회 33인)] [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김윤경}}}'''[br]'''金允經'''}}}}}}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윤경(한글학자).jpg|width=100%]]}}} || || '''이명''' ||김일파(金一波) || || '''호''' ||한결 || || '''본관''' ||[[경주 김씨]][* 계림군파 20세 '''경(經)''' 식(植) 항렬. 아버지 김정민(金正民)은 19세 정(正) 항렬.][[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102|#]] || ||<|2> '''출생''' ||[[1894년]] [[6월 9일]][* [[http://db.history.go.kr/id/ia_1191_0929|1937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와 [[http://db.history.go.kr/id/im_101_21400|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는 생년이 1894년 5월 28일로 기재되어 있다.] || ||[[경기도]] [[광주시|광주부]] 오포면 고잠리[br](현 경기도 [[광주시]] [[고산동(광주)|고산동]] 고잠동)[*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https://www.korean.go.kr/nkview/nklife/1995_3/5_3.html|#]]] || ||<|2> '''사망''' ||[[1969년]] [[2월 3일]] (향년 76세) || ||[[부산광역시|부산시]] [[동구(부산)|동구]] [[범일동]] 제일병원[br](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 '''묘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윤경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부 오포면 고잠리(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고잠동)에서 아버지 김정민(金正民)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누하동|누하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249번지에 [[http://db.history.go.kr/id/ia_1191_0929|본적을 두고 있었고]], 1950년[* [[http://db.history.go.kr/id/im_101_02832|1950년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 참조]]]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서울)|신당동]][* 1975년 [[중구(서울)|중구]]에 편입되었다.] 101-4번지에 거주했다. 1955년[* [[http://db.history.go.kr/id/im_101_02832|1955년 간행된 대한연감 4288 참조]]]~1956년[* [[http://db.history.go.kr/id/im_101_21400|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 참조]]]에는 [[서대문구]] [[신촌동(서울)|신촌동]] 101번지에 거주했고, 1967년[* [[http://db.history.go.kr/id/im_101_02832|1967년 간행된 대한민국인물연감 제1편 참조]]]에는 서대문구 [[창천동]] 13-26번지에 거주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4세 때 상경하여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 입학, 졸업했다. 이때 [[주시경]]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국어 연구에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후 4년여간 [[마산]] [[창신고등학교|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재직하였고 1917년 다시 상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전인 1921년 [[이병기(국문학자)|이병기]] 등과 함께 창립위원으로 [[한글학회|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여 국문 연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수양동우회]]의 전신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2년여간 [[배화여자고등학교|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을 맡았다가 1926년 [[일본]] [[릿쿄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돌아가 계속 근무하는 한편 한글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1931년 이후에는 [[여름방학]]이 되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습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 [[파일:김윤경(수양동우회).png|width=70%]] || || 1937년 8월 23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종로경찰서|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고, 곧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1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인 1938년 7월 29일 [[보석(법)|보석]]으로 [[http://db.history.go.kr/id/ia_1191_0929|출옥하였다]]. 이후 다시 투옥되었으나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1심에서는 [[무죄]]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4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194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의 공소가 이유 있음으로 받아들여져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28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7&evntId=0034982211&evntdowngbn=Y&indpnId=000001384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여 1941년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09&evntId=0034970112&evntdowngbn=Y&indpnId=000000258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사실 심리가 이뤄졌고]], 그해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한 2심 판결이 파훼되고 결국 [[무죄]]가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4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7626&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선고되어]] 출옥했다. 그러나 투옥된 경력으로 인해 5년간 실직하여 1938년 1월 <조선문자급어학사>를 출판하는 등 조용히 국문 연구에만 매진하였고 1942년 [[성신여자고등학교|성신가정여학교]]의 교사로 가까스로 복귀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홍원군|홍원]]경찰서에 검거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를 역임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사직을 맡았고, 1945년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를 역임하였다. 1949년 그의 저작인 <조선문자급어학사>가 4대 명저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1952년부터는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국사편찬위원, [[6.25 전쟁]]으로 인한 교사복구추진위원, 대한교육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54년 7월 28일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2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57년에는 기독교공로상·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를 퇴임하였으나, 국어심의회 위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과 [[한양대학교]]의 강사를 지냈고, 학술문화발전 공헌공로상과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국어학과]] 교수로 부임하고,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전국국어국문학교수단 이사장의 일을 맡았고, 고희기념으로 <한결국어학논집>을 펴내는 등 평생을 한글 연구 및 후진 양성에 바쳤다. 이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냈다. 1969년 1월 28일 [[부산시|부산]]·[[울산]]지방 산업단지 교수시찰단의 일원으로 [[부산광역시|부산시]]로 여행을 갔다가 2월 2일 [[과로]]로 졸도하여 부산제일병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02040020920702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02-04&officeId=00020&pageNo=7&printNo=14558&publishType=00020|입원했다]]. 그러나 하루 뒤인 2월 3일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1186944|#]] 사후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596|#]] == 여담 ==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연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慕華丸)에 중독된 가짜 명나라인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이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 >김윤경, ''조선문자급어학사'',(조선기념도서출판관, 1938) 생전에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를 사대주의자로 극딜한 바 있다. 그가 이 글을 쓴 시기는 식민지기로 [[일본 제국|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민족의식을 정립하고 고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당면 과제였으니,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민족 의식의 주요 구성요소인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그에게 반민족행위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만리를 부패한 [[저능아]]라고 평한 것은 다소 지나치며 [[인신공격]]에 가깝다. 때문에 최만리의 후손인 [[해주 최씨]] 종가에서는 김윤경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김윤경의 호를 딴 '한결 하우스'라는 건물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교수]][[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 계림군파]][[분류:1894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언어학자]][[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릿쿄대학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재직]][[분류:한양대학교 재직]][[분류:이달의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