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元圭 1904년 ~ 1968년 대한민국의 교육자로 특히 [[서울고등학교]]의 아버지라고 일컫어도 될 만큼 서울고등학교의 발전에 기여했다. 1904년 [[황해도]] [[옹진군(황해남도)|옹진군]] 출생으로 1925년 [[평양고등보통학교]], 192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함흥농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 이후 1932년 경기여고 교사, 1945년 경기도 학무과장, 1946년 [[서울고등학교|서울중학교]]장, 1957년 [[경기고등학교]]장, 1964년 [[서울특별시교육청|서울시 교육감]], 1966년 [[경기공업고등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고등학교(당시 6년제 서울중학교) 개교와 함께 초대 교장을 맡으며 무려 11년간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료 자제들이 주로 재학하던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를([[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9/13/100650/2|참조]]) 접수하여 새로이 서울중학교로 만들면서 자신의 모교였던 평양고보 스타일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6182|신문로 감옥소]]'''라 불릴 만큼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그러나 김원규 교장 본인은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실시해 단숨에 서울고를 전국 명문고로 부상시켰다. 이와 함께 평양고보 졸업생들은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002100048|평양고보의 복교]]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자제들을 서울고에 진학시켰다고 한다. 서울고 교장에서 경기고 교장으로 옮기면서 서울고에서는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정년을 1년 앞둔 [[1968년]] 일본 출장 도중 사망하였다. 서울고등학교 동문들은 그의 노고를 기려 흉상과 어록비(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를 서초동 서울고 교정에 세웠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105100066|그에 대해 자세히 다룬 기사는 이 곳을 참조하자.]] [[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옹진군(황해남도) 출신 인물]][[분류:실향민]][[분류:1904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원규, version=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