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a4f22, #34632a 20%, #34632a 80%, #2a4f22)" '''{{{+1 김오랑}}}[br]金五郞 | Kim Oh-rang'''}}}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kor.gif|width=100%]]}}} || ||<|2> '''출생''' ||[[1944년]] [[4월 5일]] ||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삼정동(김해)|남역리]][br](現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김해)|삼정동]] 119번지)[*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45|#]]] || ||<|2> '''사망''' ||[[1979년]] [[12월 13일]] (향년 35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거여동]][* 1988년 1월 1일 [[송파구]] 관할이 되었다.] [[육군특수전사령부]]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2923호 || || '''본관''' ||[[김해 김씨]] || || '''배우자''' ||백영옥 || || '''학력''' ||김해 삼성국민학교 {{{-2 (졸업)}}}[br]김해중학교 {{{-2 (졸업 / 10회)}}}[br][[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김해농업고등학교]] {{{-2 (졸업 / 34회)}}}[br][[육군보병학교]] {{{-2 (졸업)}}}[br][[육군공병학교]] {{{-2 (졸업)}}}[br][[육군포병학교]] {{{-2 (졸업)}}}[br][[육군대학]] {{{-2 (졸업)}}} || ||<-2> '''군사 경력''' || ||<|2> '''복무''' ||[[대한민국 육군]][* 군번 19536] || ||1969년 ~ 1979년 || || '''임관''' ||[[육군사관학교]] {{{-2 (25기)}}} || || '''최종 계급''' ||[[중령]] {{{-2 (대한민국 육군)}}}[* 1990년 특진 추서된 계급으로 전사 당시 계급은 [[소령]]이다.] || || '''최종 보직''' ||[[육군특수전사령부]] [[비서실장]] || || '''주요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전속부관]][br][[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 || || '''병과''' ||[[보병]] || || '''상훈''' ||[[보국훈장]] 삼일장 || || '''참전''' ||[[베트남 전쟁]] || [목차] [clearfix] == 개요 ==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특수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소장(계급)|소장]]의 [[비서실장]]. 정병주 사령관을 불법체포하려던 반란군 신군부 측 무장 병력에 홀로 맞서다가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에게 피살당했다. 사망 당시의 계급은 소령이었으며 사후 10여 년이 넘도록 추서되지 못하다가, 1990년에 이르러서야 중령으로 추서되었다. == 생애 == === 12.12 이전의 이력 ===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김해읍 [[삼정동(김해)|남역리]](現 [[김해시]] [[삼정동(김해)|삼정동]]) 119번지에서 아버지 김종수와 어머니 임순이 사이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막내)로 태어났다. 1957년 김해 삼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또래보다 1년 늦게 김해중학교(10회)에 입학했다. 김해중학교 졸업 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김해농업고등학교]](現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34회)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80337|합격했으나]], 학비 문제로 인해 등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5년에서야 [[육군사관학교]](25기)[* 동기로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남재준]] 전 국정원장, [[황진하]]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에 입교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69년에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첫 부임하게 되었다. [[중위]] 진급 후 1970년 7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한국군|베트남 파병]]을 다녀왔고, 이듬해인 1971년 10월에 귀국했다. 1972년에는 [[육군3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충남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에 부임했고, 1974년에는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육군특수전사령부]](이하 [[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작전장교]], [[정보장교]] 등 여러 보직을 거치며 3년 8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 과정에 입교했고, 육군대학 졸업 후에는 [[소령]]으로 진급해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심각한 시력장애를 앓았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수도권에 계속 머물고자 했던 것이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불과 한 달 만인 1979년 3월에 특수전사령부 행정장교로 발령받아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 12.12 당시의 상황 ===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와 육군특수전사령부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였기 때문이다.[* 수도권에 있는 특전사 부대 4개 여단 중 3개 여단([[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이 하나회 소속이었으며, 여단장들은 12일 저녁부터 [[제30경비단]]에 와서 앉아 있었다. 수경사는 특성상 서울의 방위하지만 기본적인 편성 자체에서 주요병력이 청와대 경비를 위한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이었는데, 이들은 하나회 소속이었다. 이외에 그나마 병력이 있는 것이 [[군사경찰단(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과 [[제1방공여단|수도경비사령부 제10방공포병단]]이 있었지만, 특성상 제10방공포병단은 대공방어를 위한 곳이니 필요가 없었고, 헌병단은 하나회 출신들이 아니었음에도 전두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다만 부평의 [[제9공수특전여단]]과 수도권 인근 사단들([[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사단]] 등)을 필요시 [[충정부대]]라는 명목으로 수경사 예하에 둘 수있어서 위협이기는 하였다.] 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제압을 포함한 지휘부 무력화를 위해 동원된다. 이날 저녁, 김오랑 소령은 아내 백영옥에게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 라는 마지막 전화를 남겼고, 백영옥은 마지막으로 한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고 한다. 12월 13일 새벽, 제3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최세창 준장이 돌아간 지 10여 분 뒤 제3공수특전여단 제15[[대대장]]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체포조 10여멍이 특전사령관실로 진입했는데, 이는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사령부 건물이 바로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오랑 소령만이 정병주 장군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 심지어 자신이 모시는 장군과 [[제독]]을 목숨바쳐 지켜야 할 [[전속부관]]이 포함된 대부분의 장교들이 신군부 측에 회유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오랑 소령에게도 신군부 측의 회유가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김오랑 소령은 이를 거절하고 상관을 호위하기로 결심하였다.[[https://youtu.be/WiuYd6JvHMk| '한겨레 포커스' 관련영상 ]] 체포조가 투입될 당시 김오랑 소령이 가진 무기는 8발이 들어있는 [[M1911|권총]] 한 자루에 불과했다. 결국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에게 가슴과 배 등에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s-2|전사]]했다. 시신은 당초 [[특전사령부]][* 당시 특전사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했다.] 뒷산에 암매장되었으나 동료 장교들의 항의로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에 이장되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에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381973#cb|따르면]]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에서 김오랑의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지시했으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김오랑의 장례식을 부대장으로 치르고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정호용 장군이 쿠데타 주역은 아니지만 전두환의 측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꽤 의외의 일.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오랑 비서실장의 빈소를 차린 일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래도 뒤숭숭한 특전사 내부 분위기를 수습하고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함이거나 혹은 정호용 장군 개인의 양심 문제였을 수도 있다. === 순국 후의 이야기들 ===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막내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다. 김오랑의 부인인 백영옥(白榮玉)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완전 실명했다. 체포조를 지휘했던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가까운 선후배라서 충격은 더했다. 두 사람은 관사에서도 위아래층에 살던 이웃이였고 쿠데타가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들끼리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훗날 백영옥은 관사에서 퇴거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갈 곳도 없는 상황이였다. 관사에 머무는동안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총격에 맞은 김오랑을 의무실까지 업어준 당번병을 찾았다. 그 역시 상관들에 의해 함구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설득끝에 친하게 지낸 이웃인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이 지시했단걸 알게 되었다. 그 뒤 전화로 왜 그랬냐고 원망하듯 따지자. 박종규 중령은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 거요!"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백영옥이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 라며 일갈하자 반론하지 못하고 끊어버렸다고 한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기업 사원 월급이 보통 30만 원 정도였으니 제법 큰 돈이었다.]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의 건강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1944)|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으며, 1991년 6월 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실족사로 수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백영옥의 유족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떨어진 난간의 높이가 고작 사람의 허리정도인데 어떻게 거기서 실족해 떨어졌냐는 것.] 그나마도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경찰에서 슬쩍 실족사로 수정한 것이다.[* 사실 이전인 1988년에 그보다 먼저 김오랑 중령의 상관이었던 [[정병주]] 소장이 12.12 진상조사 및 김오랑 중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 갑자기 실종후 120여일이 지나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또한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건만, 괴상망측한 까닭에 걸려서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백영옥은 사후 친정 오빠들에 의하여 수습되고 화장처리되어 1991년 11월 15일 친정오빠였던 백영도씨가 [[부산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를 신청하여 20년 가까이 무연고자로 방치되어있다 2008년 3월 31일 개장되어 무연고자들과 합동으로 산골되었다고 한다. 김오랑을 사살한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은 [[소장(계급)|소장]] 계급까지 진급하였으나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당시 강제 [[예편]]되었고 [[군인연금]]도 [[토사구팽|끊기고 비참하게 살다가]] 2010년 12월 7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늦게나마 참회했는지, 죽기 1년 전인 2009년 12월 9일, 참군인 김오랑기념사업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벌이라면서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62871|#]] 2022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김오랑 중령의 사망을 '''전사'''로 판정하였다.[* 과거에는 순직.] 김오랑 중령은 적 교전-[[12.12 군사 반란|무장 반란]] 등을 방지하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된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374485?sid=100|#]] == 추모 ==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수십년이나 지났지만, 김오랑 중령을 비롯하여 반란군에 대항하다 사망한 장병들에 대한 추모사업은 신군부의 핵심 장본인들을 반란수괴로 단죄했음에도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전반기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직을 맡게 된 [[강창희]] 의원은 김오랑 중령과는 육사 동기이지만 [[하나회]] 출신이라 특별법 상정을 꺼린다는 [[카더라]]가 돌 정도. 2009년 고 김오랑 중령 추모사업회는 "지난 11월 11일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건의안'을 여야 국회의원 48명이 공동 발의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아무도 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4월 22일에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748146|#]][[http://www.ytn.co.kr/_ln/0101_20130422151152467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221124501&code=910402|#]]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서훈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고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사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 [[송영근]] 의원은 "12·12는 법원 판결로 군사반란으로 규정이 돼 있다. 국방부에서 이와같은 사람의 공적을 기려줘야 앞으로 상무정신이 살아나고, 진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반면 [[김종태(1949)|김종태]] 의원은 "여기 예비역, 현역군도 반역군의 후배다. 그 당시 임무 수행에서 김관진 장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며 "안보 상황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군을 분열시키는 논란은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관진]] 국방장관마저 "[[정병주|상관]] 신변을 보호하고 경호를 하는 것은 부관으로서의 임무이고 또 그분(김오랑)의 정신이나 행위를 높이 평가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결국 무공[[대한민국 훈장|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하게 되었다.[* 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자'를 대상으로 하며, 보국훈장은 '전투 이외의 공적으로 국가안보에 기여한 자'를 대상으로 수여한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고 김오랑 중령과 반란군의 전투를 전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보국훈장은 총 5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위에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문제는 이게 '''서훈자가 국가에 바친 공헌도와 전혀 상관이 없다.''' 가장 높은 통일장은 대장, 두 번째 국선장은 중장, 세 번째 천수장은 소장과 준장 및 군무원 1급, 네 번째 삼일장은 영관급과 군무원 2~4급, 가장 낮은 광복장은 위관급 장교와 병, 부사관들이 받는 식으로 공헌과 상관없이 단순히 계급에 따라 등급이 미리 정해져 있다. 김 중령이 삼일장인 이유는 고인의 공헌과 상관없이 그저 계급이 중령이라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YA_NP_20140402_00813146.jpg|width=100%]]}}} || || 김오랑 중령의 형인 김태랑(왼쪽)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전수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 2014년 4월 1일 [[특전사령부]] 연병장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7&bbs_id=BBSMSTR_000000000004&ntt_writ_date=20140402|국방일보 기사]] 그러나 이 전수식을 다룬 국방일보 기사는 김오랑 중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칭송하면서도 김 중령이 [[하나회|누구에 대항해서]] 그 살신성인 정신을 발휘하다가 전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 훈장 수여를 추진한 [[민홍철]] 의원과 [[유승민]] 의원은 보답으로 김오랑의 유가족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그런데 유승민은 반란 당시 문제의 [[제33경비단]] 소속으로 복무했다. 물론 당시 유승민은 일반 병사여서 하나회와는 관련이 없지만, 묘한 인연이긴 하다. 그래서 유승민이 당시의 경험 때문에 김오랑에게 나름의 속죄를 하겠다는 의미로 훈장 추서를 추진했다는 해석도 있다. == 미디어 매체에서 == * [[MBC]]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이종국]] 씨가,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양동재]] 씨가 맡았다. 특히 제5공화국의 나레이션을 맡은 [[안지환]] 성우는 자신이 죽인 김오랑 중령을 보며 오열하는 박종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설했다. > "적과 동지. 불과 몇시간 전만해도 전우였고 아래윗집에 살며 형과 동생처럼 지냈던 박종규와 김오랑. 이날 밤 이들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차가운 총구를 겨누었다. 과연 이들에게 쿠데타는 어떤 의미였고 조국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영화)|서울의 봄]]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오진호'''가 등장하며 [[정해인]]이 연기한다. == 기타 == * 강경 보수 인사로 유명한 [[남재준]] 전 [[국정원장]]이 그와 육사 동기였다.[* 시간이 지나고도 친구 무덤에 찾아가서 울분을 토했던 걸 보면 꽤나 친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때의 남재준의 행보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남재준은 소령 계급으로 [[육군대학]] 교관을 맡고 있었고, 친구가 사망한 직후 강의 도중 군의 정치개입을 강력히 성토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가 육군대학 교관이었다는 것은 유능한 장교였음을 방증한다. 육대 교관 중 한직도 물론 있지만, 정규과정 장교를 직접 대면하고 강의해야 하는 육대의 소령급 교관은 예나 지금이나 [[요직]]이다.] 자주 김오랑 중령의 무덤을 찾아가 울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즉, 육군 내부의 청년장교들 중 전두환 반대파였기 때문에 단단히 찍혔던 것.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2/200409220500015/200409220500015_3.html|新東亞 2004년 10월호 기사]][* 전두환에 대한 증오가 나이를 먹어서도 식지 않았는지 남재준은 국정원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전두환]] 은닉재산을 추적해 데이터를 모아 검찰에 넘겨줘서 터트리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끝내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았으나 대신 그의 차남을 노역신세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관련 문서 == * [[12.12 군사반란]] * [[군인]] * [[대한민국 국군/인물]] * [[애국자]]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김해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김씨]][[분류:1944년 출생]][[분류:1979년 사망]][[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베트남 전쟁/군인]][[분류: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출신]][[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보국훈장 삼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