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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김영래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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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농구단 해체설이 나오던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정규리그 3위팀 [[연세대학교]][* [[황성인]]-[[김훈(농구)|김훈]]-[[우지원]]-[[김택훈]]-[[구본근(농구)|구본근]] + [[조상현]], [[조동현(농구)|조동현]] 등이 주축으로 정규리그 개막전에서 기아자동차를 잡는등 서장훈이 없음에도 여전히 강호의 면모를 과시했다.]를 잡는 등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으나, 이 대회가 끝나고 결국 한은 농구단은 해체되었다. 팀 해체 당시 대부분의 한국은행 선수들이 일반 은행원으로 남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90년대 한은의 위상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신의 직장!!) 당시 한국은행의 간판슈터였던 김동철(180cm)과 가드 이진형(176cm) 등은 아직도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27세로 선수로서 한창이던 김영래는 [[김상준(농구)|김상준]], 이승학(F,187cm)과 함께 [[한국산업은행|산업은행]] 농구단을 인수해 갓 창단한 [[원주 동부 프로미|나래이동통신]]으로 이적했고, 나래 소속으로 [[1996-97 농구대잔치]]에 출전했다. 농구대잔치 직후 개막한 1997 KBL 원년시즌에서 김영래는 [[강병수]](PF, 191cm), [[제이슨 윌리포드]](C,194cm) 콤비를 보좌하는 백업 빅맨으로서 평균 10분가량 출장했고, 당시 약체로 평가밭은 [[원주 DB 프로미|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골밑을 잘 지켜내며 팀이 정규리그 3위 및 챔피언결정전 결승까지 오르는 "나래 돌풍"에 일조한다. 특히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맞붙은 챔피언결정전에서 김영래는 상대팀의 장신 에이스 [[김영만(농구)|김영만]]을 묶기위해 4차전부터 선발출전하지만 결국 팀은 1승 4패로 원년시즌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원년시즌 KBL엔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부산 기아]]의 [[클리프 리드]]-[[김유택]],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동양]]의 [[전희철]],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SBS]] [[정재근(농구)|정재근]] 말고는 제대로된 빅맨이 별로 없었고, 덕분에 [[강병수]]-김영래-[[제이슨 윌리포드]]의 꼬꼬마 빅맨군단으로도 한 시즌을 보낼 수 있었지만, 97-98 시즌 들어 각 팀들이 2m가 넘는 빅맨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전시즌 준우승팀 원주 나래의 골밑은 어느새 KBL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 되어 버렸다. 주전 4번이자 전시즌 수비 5걸이던 [[강병수]]마저 경쟁력을 잃고 투명인간화되어버린 상황에서 김영래는 같은 백업신세인 최호(193cm), [[정한신]](192cm) 등과 출장시간을 더 쪼개며 팀내 존재감이 미미해졌고, 플레이오프 들어서는 [[최호(농구)|최호]]에게 식스맨 자리마저 밀려나며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택했다. == 지도자 생활 == 은퇴 직후 모기업 나래이동통신에서 통신기기 판매 업무를 잠시 맡았으나 당연히 적성에 맞지 않았고, 1999년 연고지 강원도에 있는 [[강원사대부고]] 농구부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가르친 제자가 우리동네예체능, 버저비터 등 농구예능에 자주 출연했던 선출 연예인 [[김혁(1981)|김혁]]이다.] 이후 2004년 중앙대 [[강정수]][* 광주고-중앙대 출신인 고교-대학 직계 선배다.] 감독의 부름을 받아 모교 농구부 코치로 부임, 2시즌을 보낸다. 이시절 김영래 코치는 [[광신상고]] 출신 00학번으로 입학했다가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역 입대해버린 한 선수를 제대직전에 직접 설득해 다시 농구부에 복귀시켰는데, 그게 바로 KBL 00-01 시즌 MVP [[박상오]]다. [[2006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농구부로 이동하여 현재까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제물포고 시절 키워낸 제자들의 면면이 꽤나 화려하다. 특히 제물포고 부임 첫해 당시 고 3이던 [[오세근]]을 지도하며 고교 랭킹 1위급 센터로 키워냈고, 이후 중국 출신 귀화선수 [[김철욱]][* 고교시절까지는 중국 이름인 "우띠롱"을 썼다. 당초 군산고에 입학했다가 제물포고로 전학간 케이스.](안양 KGC), [[김윤태(농구선수)|김윤태]](수원 KT), [[한희원(농구선수)|한희원]], [[변준형(농구선수)|변준형]](이상 안양 KGC), [[차민석(2001)|차민석]](서울 삼성) 등을 길러냈다. 2012년 FIBA Asia U-18 대표팀 감독을 맡아 당시 제 2의 황금세대로 불렸던 [[천기범]]-[[최성모]]-[[최준용(농구선수)|최준용]]-[[강상재]]-[[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의 베스트 5로 팀을 대회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연장접전끝에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듬해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2013년]] FIBA U-19 대회에서도 감독을 맡아 이들 멤버들로 세계무대에서의 돌풍을 노렸으나, 대회 직전 주전센터 [[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이 코뼈 부상으로 낙마하는 바람에 팀 전력 구성에 차질을 빚었고, 대회에선 세계수준과의 현격한 격차를 실감하며 예선 3경기 전패, 이후 순위결정전에서 접전 끝에 2승을 거두며 16팀 중 최종 13위를 차지했다. == 여담 == * 중앙대 1학년이던 1987년 [[대학농구연맹전]] 추계대회 연세대와의 결승전에서 연대 2학년 [[강양택]]을 주먹으로 가격하며 양팀의 집단 난투극을 일으키기도 했다. * 2013년 FIBA U-19 대표팀 감독 시절, [[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이 당시 [[유재학]] 감독이 이끌던 국가대표팀과 U-19팀에 중복 선발되자, "이종현은 중요한 선수다"라며 2개 대회를 모두 뛰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 '''"선수혹사로 성적만 내보려고 하는 구시대 학생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당시 프라하 FIBA U-19 대회는 6월말~7월중순까지 열렸고, [[FIBA 농구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마닐라 아시아선수권 대회는 [[8월 1일]]이 개막전이라 일정이 겹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7월 중순에 대회를 마치고 [[체코]] [[프라하]]에서 [[필리핀]] [[마닐라]]까지 날아가 대회를 연속 참가하라는 건 [[2000년]] [[이동국]]이 겪었던 올대-국대 혹사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종현이 6월 대학리그 경기 도중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 바람에 청대 엔트리에서 빠졌고, 덕분에 8월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1968년 출생]][[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991년 출생]][[분류:1998년 은퇴]][[분류:파워 포워드]][[분류:광주고등학교(광주) 출신]][[분류:중앙대학교 출신]][[분류:원주 DB 프로미/은퇴,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