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94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 || 이종호 [br] ([[경기고등학교 야구부|경기중학교]]) || → || '''김양중 [br] (광주서중학교)''' || → || 최명보 [br]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업중학교]])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1567475d1ebbf60cbbe775426646ea1f87f7528ccfd2780eebcd56b29c21f35f.jpg|width=100%]]}}} || ||<-2> {{{-2 {{{#gray 왼쪽 인물이 [[김양중(야구)|김양중]]. 오른쪽 인물은 당시 국가대표 포수였던 [[김영조(야구)|김영조]]}}} }}} || ||<-2> '''{{{+2 김양중}}}[br]金洋中 | Kim Yang-joong''' || ||<|2> '''출생''' ||[[1930년]] [[9월 3일]] ||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군]] || || '''사망''' ||[[2013년]] [[10월 27일]] (향년 83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서중학교]] {{{-2 (졸업)}}}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좌투좌타]] || || '''소속 구단''' ||[[농협 야구단|금융조합 야구단]][br][[상무 야구단|육군 야구단]][br][[기업은행]] 야구단 || [목차] [clearfix] == 개요 == 1940~50년대 한국 야구를 풍미했던 [[야구 선수]]. 해방 이후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중학교]] 출신의 [[장태영]]과 함께 한국 최고의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영호남 출신 에이스 투수의 경쟁이라는 점에서 둘의 라이벌 구도는 후배격인 [[최동원]]과 [[선동열]]의 관계와도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고교야구 시절 == 1949년 제4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청룡기]] 결승전에서 [[장태영]]이 이끄는 당대의 강팀 경남중을 상대로 마운드에서는 11이닝 1실점으로 역투했으며, 9회말 2사 2루에서 장태영의 공을 받아쳐 동점을 만드는 중전 적시타를 치면서 광주서중의 11회 연장 역전승을 이끌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청룡기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서울대]] 상대 등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졸업 후 바로 금융조합 야구부에 입단한다. == [[실업야구]] 시절 == 각종 실업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무기는 직구였는데, 빠르고 묵직한데다 직구가 슈트처럼 꺾여 들어와서 상대 타자들로서는 무척 치기 힘들었다고 한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1955년에는 [[상무 야구단|육군 야구단]]에 입단하여[* 원래 공군으로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육군 야구단 측에서 재빨리 김양중을 채갔다고 한다.] 중견수 [[장태영]], 좌익수 [[박현식]] 등과 함께 활약했다.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3112200995_0.jpg]] || || 왼쪽부터 순서대로 김정환, [[박현식]], [[장태영]], 김양중 || 1958년에는 내한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벌인 경기에서 0-1로 뒤진 1회 무사 2, 3루에서 선발 배용섭을 구원해서 9이닝 7안타 2실점 4탈삼진으로 호투했다.[* 경기는 한국대표팀이 3-0으로 ~~선방~~ 석패했다.] 특히 6회에는 당대의 강타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아내기도 했다.[* [[스탠 뮤지얼]]은 메이저리그에서 22시즌 동안 .331에 475홈런 1951타점 3,630안타를 기록했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대선수다.][* 당시 볼카운트 투앤투에서 스트라이크에 가까운 공이 들어갔는데 심판이 잡아주지 않자, 스탠 뮤지얼이 고개를 끄덕거린 후 그 다음 아웃코스로 한참 빠지는 볼에 일부러 삼진을 먹어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본인의 신사적인 인품과 함께, 홈팀이자 약체였던 한국팀의 체면을 세워주는 제스처였던 셈.] 거의 40년만인 1997년에 스탠 뮤지얼이 내한했을 때 김양중과 당시를 회고했다고 한다. == 은퇴 이후 == 그 이후 1961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1962년 기업은행 감독으로 선임되어 당시 [[한국상업은행]] 감독이던 [[장태영]]과 고교 졸업 이후 다시 한번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기업은행]]의 투수로는 우리가 다들 아는 [[김성근]] 감독, 그리고 70년대 '역전의 명수'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의 전국대회 6차례 석권을 이끌었던 최관수 감독 등이 있었다. || [[파일:external/dimg.donga.com/31081814.17.jpg]]||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시구하는 장면|| 1967년에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기업은행]]에서 1986년까지 은행원 생활을 했으며 [[지점장]]까지 지냈다. 1982년에는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현장을 떠난지 오래였던 터라 불발되었다. 2008년에는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의 [[2008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1차전]]의 시구를 맡아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아내기도 했다. 201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 여담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양중, version=53)] [[분류:1930년 출생]][[분류:2013년 사망]][[분류:광주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광산 김씨]][[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좌투좌타]][[분류:좌완 투수]][[분류:농협 야구단/은퇴, 이적]][[분류:상무 피닉스 야구단/전역]][[분류:기업은행 야구단/은퇴,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