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5대 국회의원/서울특별시)] [[파일:external/rokps.or.kr/668.jpg|width=150]] 金山 1898년 10월 12일 ~ 1984년 8월 20일(85세) [[대한민국]]의 전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한양|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중국]] [[난징]] 금릉대학(현 [[난징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한편, [[김산|동명의 인물]]처럼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 간 투옥되었다. 이후에도 혁명단체 한중동지사를 조직하는 한편, 중국 동방약소민족연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이기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통합야당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서울특별시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최규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게다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무리하게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민정당]]에 몸담았다가 [[국민의당(1963년)|국민의당]]으로 옮겼다. 같은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정당 [[윤제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독립당(1963년)|한국독립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1971년)|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1967년)|신민당]] 윤제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분류:제5대 민의원의원]][[분류:민주당(1955년) 국회의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898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난징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