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상대등)] ||<-5><:> [[천마도|[[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width=60]]]] [br] '''[[상대등|{{{+1 {{{#ffffff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 || [[진복]] || {{{+1 ←}}} || '''{{{#ffffff 김문영}}}''' || {{{+1 →}}} || [[김개원]] || 金文穎 생몰년도 미상 [목차] == 개요 == [[신라]] 중기의 [[장군]].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을 생략하고 문영(文穎)으로 기록된 곳이 더 많다. 혹은 영(永)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생애 ==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독군(督軍)으로 참전했는데, 신라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결사대가 신라군의 발을 묶었던 바람에 당나라 군대와의 합류 예정일보다 늦게 도착했다. 당군의 지휘관 [[소정방]]은 김문영의 목을 베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자[* 전쟁에서 약속 기일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은 굉장히 큰 죄다.] [[김유신]]이 반발하며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백제보다 너희 당나라부터 치겠다!"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항의해서 김문영은 겨우 살았다. 이 일화는 신라와 당나라가 결국 연합이 깨지고 [[나당전쟁]]까지 가게 되는 전조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전쟁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기일을 어기는 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큰 죄이기는 한데, 처절한 황산벌 전투를 치른 탓에 어쩔 수 없이 기일에 늦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고대 사회라 해도 이런 경우는 대개 정상 참작이 되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기일을 어겼다면 죄를 묻지 않거나 경감을 시켜 주는 대신 '어쨌든 늦은 건 늦은 거니 열심히 싸워 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는 식으로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삼국지를 예로 들면 기일을 어겨 단곡 전투 패배의 원인이 된 [[호제]]가 이후 큰 처벌 없이 벼슬 살이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위군이 길을 막아서 기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는 식으로 넘어갔다는 해석이 있다.] 장수의 목을 베겠다고 나서는 건 신라 입장에서는 큰 모욕이였으니까. 661년 7월 17일에는 지금의 [[강원도]] 일대인 수약주(首若州) 총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668년까지 고구려 방면 전선에 있었는데, 664년 7월에는 [[김인문(신라)|김인문]], [[김품일]], [[김군관]] 등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점령했다. 668년 고구려 총공격 때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으로 참전해 평양 남쪽 사천(蛇川)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고([[사천 전투]]) [[평양성]]을 포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평양성 전투(668년)|평양성 전투]]) 670년, [[나당전쟁]]이 터지자 김문영은 당나라 휘하에 있는 백제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공격, 670년 7월의 대공세에서 김군관 등과 함께 12개 성을 빼앗고 7천명을 목베고 수많은 말과 병기를 노획했다. 이후 한동안 기록이 없는데 전쟁공신으로서 주요 귀족의 반열에 올라, [[신문왕]]의 공신 숙청도 피해서 683년에 [[신문왕]]의 왕비 간택에 참여하고, [[효소왕]]대인 694년에는 선임자 [[진복]]에 이어 [[상대등]]에 임명됐다. [각주] [[분류:신라의 인물]][[분류:신라의 상대등]][[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