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로동당 검열위원장]] [[분류: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장]] [[분류:조선로동당 3기 검열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4기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4기 검열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5기 검열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5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1902년 출생]] [[분류:1978년 사망]] [[분류: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 [[분류: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분류:4기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회 위원]] [[분류:4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분류:6.25 전쟁/군인]] [[분류:경흥군 출신 인물]] [[분류:주 알바니아 북한 대사]] [[분류:주 체코슬로바키아 북한 대사]] [목차] == 개요 ==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정치가. == 생애 == 1902년 10월 10일에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출생했다. 1930년부터 반일 혁명에 가담했다고 하며 1933년에 빨치산에 가담했다. 1935년 봄 시점에서 1로군 산하 훈춘부대 4단 연장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인민군에 참여, 평양 독립여단의 박격포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단정치위원까지 승진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검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2월 2일, [[림춘추]]의 뒤를 이어 알바니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1959년 6월, [[최용건]]의 알바니아 방문을 수행하였다. 1961년 2월 16일, [[안영(1903)|안영]]에게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62년 11월 21일, 장익환의 뒤를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1963년 10월 쯤 귀국하였는지 박용진이 임시 대리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전임 검열위원장 [[김익선]]이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조동 조치됨에 따라 신임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검사위원장 자리는 [[리봉수]]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장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검열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조국전선 의장으로 은퇴하였고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1978년 12월 27일 19시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해방후 당 및 국가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통일단결과 당대렬의 순결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하였다.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이후 반신상이 제작되었다. 항일 빨치산 1세대 치고는 정말 눈에 안 띠는 삶을 살다가 조용히 갔다. == 참고문헌 ==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