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여성 독립운동가)]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란사}}}'''[br]'''金蘭史'''}}}}}}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란사.jpg|width=100%]]}}} || ||<-2>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시절의 모습. || || '''이명''' ||하란사(河蘭史) || || '''본관''' ||[[전주 김씨]][*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3411491|#]]] || ||<|2> '''출생''' ||[[1872년]] [[9월 1일]] || ||[[평안도]] [[평양부]][br](현 [[평양시]]) || ||<|2> '''사망''' ||[[1919년]] [[3월 10일]] (향년 46세)|| ||[[중화민국]] [[베이징시]]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8판-8면-119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여성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상세 == 1872년 9월 1일 평안도 [[평양부]](현 평양시)에서 무역업자인 아버지 김병훈과 어머니 [[이씨]] 사이의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김동연(金東淵)이 있었다. 이후 평안도 [[안주시|안주군]](현 평안남도 [[안주시]])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으며, 가족들과 함께 상경한 뒤에는 [[한성부]] 서부 반송방 지하계 [[평동(종로구)|평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종로구)|평동]] 32번지)에 거주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1893년 17살 연상의 인천항 감리서[* [[대한제국]] 시절 [[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장에서 통상 업무를 담당하던 관아] 고위관리인 하상기(河相驥)와 결혼했다.[* 하상기는 전처 조씨 부인과 사별한 후 김란사와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3411491|재혼했다]].] 1894년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개신교]]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입학하려 했으나 [[금혼]] 학칙[* 이는 어린 소녀들을 강제 [[조혼]]에서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오히려 이는 불합리한 교칙이 되었고 2003년에 폐지되었다.]에 따라 거절당했다. 그러자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면서 교장 룰루 프라이[*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후에는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그녀는 룰루 프라이 교장으로부터 입학을 허가받았다. 이후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고 개신교 신자가 되어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받고 '란사'[* Nancy의 음역]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 모임인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에 [[국비유학|관비(官費)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귀국했다. [[정동교회]]에서 열린 [[서재필]]의 '미국의 남녀 평등한 활동'이란 강연을 듣고 미국 유학을 결심, 1897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부부동성|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 관습]]에 따라 입국신고서에 하란사(Nansa Ha)로 기재되었고, 그 후로 하란사로 알려지게 된다. 훈장증과 공훈록에도 하란사로 기재되었다가 유족의 요청으로 2018년 정정되었다. 1898년부터 [[워싱턴 D.C.]]의 [[하워드 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06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는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였다. 귀국하여 모교인 [[이화학당]]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와 [[성경]] 등을 가르쳤고, [[기숙사]] 사감이나 지금의 교감 격인 총학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제자 중에는 [[유관순]]이 있으며[* 일부 위인전에서는 입이 험하고 괄괄하지만 속내는 따뜻하며 유관순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유관순이 가담해 활동한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를 이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영문 선교지에 [[윤치호]]가 "신(新)학교 여성들은 [[바느질]], [[요리]], [[빨래]], [[다림질]]하는 법을 모르고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글을 기고하자 김란사는 "학교의 목적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라는 반박문을 실었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감리회총회에 [[신흥우]]와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머물며 미국 동포들의 단결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을 호소했다. 1919년 [[의친왕]][* 김란사와 [[의친왕]]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이다. 같은 시기에 수학했다.]의 밀지를 받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로 가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 갔으나, 1919년 3월 10일 동포들이 마련한 환영만찬회에 참석했다가 누군가에게 독살당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2018년 4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녀를 기리는 위패가 봉안됐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72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독살된 인물]][[분류:전주 김씨]][[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비유학 출신]][[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이화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출신]]